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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구] 종부세, 그 경제학적 진실 :: 2009/05/18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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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의 출범 1년을 맞아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재미있는 현상이 눈에 띕니다. 저소득 계층에서 정부 지지도가 높은 반면, 고소득 계층에서는 지지도가 낮게 나옵니다. 이 정부가 가진 사람의 이익을 충실하게 대변하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그런데도 저소득 계층의 지지도가 상대적으로 더 높게 나오니 흥미로울 수밖에요.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이처럼 뜻밖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게 되는 경우가 이것 하나만이 아닙니다. 상속·증여세 폐지가 바람직한지 물어보면 소득이 낮은 계층일수록 “그렇다”고 대답한 사람의 비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 세금과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폐지에 찬성하는 믿지 못할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주로 부유층에 혜택이 돌아가는 감세정책에 대해 물어봐도 이와 비슷한 양상이 나타납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어떻게 보면 자신의 계층적 이해관계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이 아주 멋지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선진 사회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성숙한 시민의식의 발로처럼 보이니까요. 그러나 진실은 그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상황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에 그런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여론 조작의 홍수 속에서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한동안 우리 사회를 들끓게 했던 종부세 문제도 오도된 여론 때문에 아주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부세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세금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합니다. 종부세가 이런저런 문제점을 숱하게 많이 갖고 있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습니다. 부자들을 때려잡고 서민들까지 괴롭히는 불공평한 세금이라고 비난을 퍼붓습니다. 보수 언론이 여론을 이런 방향으로 이끌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제가 전공하는 재정학은 세금 문제를 가장 중요한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뿐 아니라 전문가로서도 종부세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전문가로서 제가 보는 종부세의 진정한 모습은 보수 언론이 그리고 있는 것과 크게 차이가 납니다. 그 정확한 진실을 일반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슬픈 종부세>를 쓰게 되었습니다.        

종부세가 마치 뿔이 난 괴물이라도 되는 양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글을 통해 그런 오해가 말끔히 씻어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떤 세금이든 나름대로 문제점을 갖고 있습니다. 종부세에 몇 가지 문제점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나쁜 세금은 아닙니다. 그리고 문제점이 있으면 차츰 고쳐 나가면 됩니다. 그런데도 종부세를 당장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보수진영과 정부를 보면 잘못된 믿음이 얼마나 위험스러운 것인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종부세에서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집 한 채만 갖고 있을 뿐 별 소득이 없는 사람도 부담을 지게 된다는 점입니다. 비싼 집 한 채를 갖고 있는 가난한 은퇴자의 문제는 언론의 단골메뉴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점을 시정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과세대상 기준을 상향조정하고, 고령자와 장기보유자에 대해 감면조처를 취해 주면 소득 없는 은퇴자의 문제는 거의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종부세의 실질적 무력화를 바라던 세력은 헌재의 종부세 부분위헌 결정 소식을 듣고 환호작약했습니다. 그들로서는 세대별 합산과세가 위헌이라는 결정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습니다. 종부세의 실질적 무력화를 가져오는 데 과세방식의 변경처럼 효과적인 수단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집 부자들이 부부 명의로 분산 등기해 놓은 현실에서 이 조치 하나만으로 세금 부담을 절반 이하로 줄이는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대별 합산과세가 위헌이라는 헌재의 결정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결혼중립성이라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수평적 공평성이라는 훨씬 더 중요한 원칙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공평한 과세라는 관점에서 보면 수평적 공평성의 원칙은 거의 헌법과도 같은 중요성을 갖고 있습니다. 헌재는 이런 중요한 원칙을 헌신짝처럼 내던져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저는 미국에 머물고 있을 때 헌재의 부분위헌 결정에 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 기사를 읽고 어찌나 화가 나던지 하던 일을 때려치우고 그 결정의 부당함을 밝히는 글을 써 홈페이지에 올렸습니다. 헌재의 결정이 경제학의 기본 이론에 어긋난다는 뜻에서 제목을 <교과서를 바꿔 쓰라는 말인가?>로 붙였습니다. 수평적 공평성의 포기가 얼마나 엄청난 후퇴를 의미하는지 알기나 하고 그 결정을 내렸느냐는 강력한 항의의 메시지도 담겨 있었습니다.

그 글을 쓰고 나서도 마음의 평정을 찾지 못해 다시 <501호 김씨 가족의 분노>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수평적 공평성의 포기가 가져올 귀결을 좀 더 생생한 예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 예를 보고서도 헌재의 결정에 아무 문제도 없다고 강변할 수 있겠느냐는 도전이었습니다. 저는 이 점에 관해 어느 누구와도 맞서 싸울 자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전해 온 사람은 아직까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 세금 내기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인가는 세금을 내야 하고, 경제적 능력이 큰 사람일수록 더 많은 세금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부유한 사람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는 것을 일종의 명예로 생각한다면 종부세가 그렇게 많은 시비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지의 장막>에는 우리 사회에 이런 건전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지 못한 안타까움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나저나 이제 종부세는 거의 무력화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집 부자들이 종부세 부담이 무서워 집을 더 늘리지 못하는 일은 없어졌습니다. 또한 똑같은 경제적 능력의 소유자가 서로 다른 세금을 내야 하는 불공평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다시 세대별 합산과세로 돌아가지 않는 한 수평적 공평성의 회복은 영원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게다가 재산세로 통합하겠다느니, 아예 없애 버리겠다느니 별의별 말들이 다 나오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제는 저도 종부세에 대한 미련이 없습니다. 이런 누더기 꼴로 남아 있느니 차라리 없어져 버리는 게 더 낫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그러나 종부세가 제대로 시험되어 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퇴장의 운명을 맞게 된 데 대한 안타까움은 짙게 남아 있습니다. <종부세여, 안녕>은 때 이른 죽음을 맞은 종부세에게 제 안타까움을 실어 보내는 조사(弔辭)입니다. 언젠가는 종부세의 진가를 사후적으로나마 인정하는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믿습니다.


<아마추어 정부의 첫 1년> 에서 계속

2009/05/18 20:23 2009/05/18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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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구] 마지못해 사회비평의 붓을 들다 #2 :: 2009/04/18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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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보수와 진보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평합니다. 이념적인 입장을 떠나 객관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따져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보수에 대한 비판은 저 스스로 만든 기준에 의한 것일 뿐 어떤 이념적 잣대로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수든 진보든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해야 마땅한 일 아닙니까? 지금 보수가 우리 사회를 쥐락펴락하고 있기 때문에 비판의 화살이 주로 그들을 겨냥하게 될 뿐입니다.

예를 들어 ‘한반도 대운하사업’ 문제는 이념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그것을 구상한 측이 보수든 진보든 관계없이, 그 자체로 경제적 타당성이 전혀 없는 사업입니다. 그런데 이 사업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저는 하루아침에 ‘좌빨’이 되고 말았습니다. 보수 정권이 정력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에 훼방을 놓았으니 너는 좌빨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논리입니다. 이런 허황된 논리가 판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사회입니다.

종합부동산세나 부동산, 혹은 교육과 관련한 현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것도 이념과 무관한 일입니다. 그 정책들이 합리성을 결여하고 있어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지적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정책들이 우파적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비판하는 저는 저절로 좌파가 되어버립니다. 그동안 현 정부의 정책에 대한 제 비판에 정당한 근거를 들어 반박하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표현으로 저를 매도하는 사람들만 많이 보았습니다.

최근에 안 사실이지만, 예전에 저에게 배웠던 학생들은 저를 상당히 보수적인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더군요. 솔직히 말해 저는 그런 얘기를 듣고 상당히 놀랐습니다. 저 스스로는 그렇게 보수적인 사람이 아니었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명색이 소득분배이론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쓴 사람인데, 어떻게 보수파가 될 수 있겠느냐는 것이 제 심정이었습니다.

제가 미시경제이론을 주로 가르쳤기 때문에 그런 인상을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시경제이론을 배워본 사람은 잘 알겠지만, 그것은 가치판단이 완전히 배제된 채 순수한 경제적 논리로만 구성된 이론입니다. 그런 이론을 가르치다 보니 자연히 보수적이라는 인상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문학을 가르치는 사람은 문학적이라는 인상을 주고, 예술을 가르치는 사람은 예술적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1980년대에 제가 운동권 학생과 ‘끝장토론’을 한 적이 있다는 한 일간지의 보도는 과장된 측면이 있습니다. 운동권 학생과 설전을 벌였으니 보수적이라는 말인데,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가르치는 주류경제학에 대한 비판에는 결코 물러서지 않고 반박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비주류경제학보다 주류경제학의 현실설명력이 더 크다는 제 믿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사실 주류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은 어느 정도 보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배운 것을 모조리 부정하지 않고서야 시장이 효율성을 가져다준다는 믿음을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주류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모두 보수적 색채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도 예외가 아님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저는 다만 시장이 만능이라는 생각을 거부하고 있을 뿐입니다.

스스로 판단하기에 1980년대의 저와 지금의 저 사이에 기본 입장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던 사람이 지금은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보수화된 데 그 이유가 있다는 것이 제 믿음입니다. 저는 예전의 위치를 그대로 지키고 있는데 사회가 오른쪽으로 움직이다 보니 제 위치가 왼쪽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회 분위기의 변화에 편승하지 못하고 예전의 위치를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 저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일까요? 저는 절대로 그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비록 지금은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인상을 줄지 몰라도 시간이 흐르면 상황이 달라지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시점에서 거세게 몰아치고 있는 보수화의 바람이 결국 한때의 유행이었음이 머지않아 밝혀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미 그 전조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지만, 우리 사회의 보수는 스스로가 판 구덩이에 떨어지는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봅니다. 현 정부가 온 사회를 대상으로 실험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정책 프로그램의 문제점이 속속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여정부에 실망한 국민은 무언가 다른 것을 실험해본다는 데 솔깃한 심정이 되었을 수 있습니다. “설마 더 나빠지랴?”는 심정으로 보수적 정책 프로그램에 손을 들어주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 나빠질 수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나빠져도 크게 더 나빠질 수 있습니다. 정책을 공부한 사람은 소위 ‘개혁’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압니다. 개혁을 한답시고 추구한 변화가 결국 개악이 되고 마는 사례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아무리 아이디어가 좋고 계획이 치밀하다 하더라도 진정한 개혁으로 이어지기는 무척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정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아마추어만이 이것저것 바꿔놓기만 하면 개혁이 된다고 믿을 따름입니다.

제가 보기에 정부는 지금 위험한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실험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정책 프로그램은 검증되지 않은 소박한 아이디어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그 정책을 실행에 옮겼을 때 나타나는 결과는 그들의 기대와 판이하게 다를 가능성이 큽니다. 설익은 아이디어의 섣부른 실험은 예기치 못한 재앙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마지못해 사회비평의 붓을 들다 3편> 에서 계속

2009/04/18 10:44 2009/04/18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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