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철'에 해당되는 글 2건
[인터뷰] 주니어팀 김솔미 :: 2010/01/07 16:00

3층은 언제나 조용했습니다. 말 대신 글이 지배하고 있는 곳. 칸막이 너머에 선 수많은 이야기들이 원고 속 글자로 아로새겨져 편집자들의 애정 어린 시선을 받고 있을 터였습니다.
그들이 보고 있는 이야기는 어떤 것들일까. 궁금해진 그는 책상 쪽으로 다가섰습니다. 그때 칸막이 너머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 곳은 주니어팀 김솔미 대리님의 자리였습니다. 소리를 내며 떨어진 것은 페퍼톤스의 시디였습니다. 떨어진 시디를 주으러 책상 쪽으로 다가서는 오스카의 귀에 미카의 간지러운 노랫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녀는 자리에 없었습니다. 스피커에서는 여전히 미카의 노래가 조그맣게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녀는 책상 정리 중이었나 봅니다. 책상의 모든 서랍이 열려 있었고, 그 안에 담겨 있었을 물건들이 모두 책상 위에 서낭당 앞 돌탑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습니다. 정성스럽게 쌓여 있는 물건들이 아니었다면 도둑이 든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을 법한 광경이었습니다. 오스카는 손에 든 시디를 조심스레 물건들의 탑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그때 쌓인 물건들이 중심을 잃고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오스카는 당황해 어떻게든 일렁이는 물건들을 진정시켜보려 했지만, 물건들의 탑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오스카는 물건들을 이불처럼 덮고 누워 있었습니다. 비실비실 일어난 오스카는 바닥에 널린 물건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지었습니다. 자리를 난장판으로 만든 건 누가 뭐래도 그의 책임이었습니다. 재빨리 정리를 해야 했습니다. 이왕이면 김솔미 대리님이 돌아오기 전에 말이죠.
꼬마 니콜라의 라임 오렌지 나무
오스카는 자신의 손으로 막아내지 못해 바닥에 떨어진 책을 하나 집어 듭니다. 귀퉁이가 닳은 책 표지에는 '꼬마 니콜라의 라임 오렌지 나무' 라고 적혀 있습니다. '꼬마 니콜라'와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의 짬뽕인 것 같습니다. 책을 펼쳐 보았습니다. 군데군데 찢겨져 있고 물이 번진 것처럼 글자가 흐려져 보이지 않는 곳이 많이 보였습니다. 어릴 적 그녀가 화장실을 갈 때까지도 손에서 떼어놓지 않을 정도로 좋아하던 두 책은 이제 내용이 온전히 기억나지 않아 서로 헷갈릴 정도로 오래된 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구라다 말풍선에는 아직도 그 책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만큼 그녀에게는 감명 깊은 책이었나 봅니다.
전쟁과 평화, 두 얼굴의 역사
가까스로 팔로 막아낸 책은 '전쟁과 평화, 두 얼굴의 역사'였습니다. 반질반질한 윤기가 남아 있는 새 책이었지만 군데군데 이빨 자국이 보였습니다. 쉬이 읽어 삼킬 수 있을 만큼 말랑한 책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책을 펼쳐드니 잔뜩 그어진 밑줄이 눈에 들어옵니다. 책을 만들며 겪었던 그녀의 고충이 느껴집니다. '1939년 2차 세계대전' 이라 적힌 글자에서 수많은 밑줄이 뻗어 나온 것이 보입니다. '왜 전쟁이 나쁜가?', '군수업자의 이윤 추구', '히틀러', '홀로코스트' 등 수많은 생각의 덩어리들이 밑줄에 매달려 덜렁거리고 있습니다. 뭔가 생각할 거리가 잔뜩 담겨 있는 책 같습니다. 가만히 손을 뻗어 생각의 덩어리들을 밑줄에서 떼어내어 보려 하는데, 옆에서 커다란 물건 하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집니다.
목발
이젠 별게 다 튀어나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꽤나 오랫동안 쓴 것 같아 보이는 목발에는 꼬리표가 달려 있습니다. 'Since 2009. 5월'. 좋을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는 평이한 한해였지만, 5월에 사고를 당해 목발 신세를 지게 된 것이 그녀에게는 기억에 남는 일이었나 봅니다. 언제나 몸이 마음보다 빨랐던 그녀였기에 '마음은 멀리 있는데 몸은 여기 있어야만 하는' 3주간의 목발 생활은 괴롭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모로 신경써주는 회사 동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낸 기간이기도 했습니다.
똘레랑스 1015
어렸을 때처럼 그녀는 요즘도 책을 달고 다니는 모양이었습니다. 오스카는 점심시간에 그녀가 이 책을 들고 휴게실로 들어가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 책에 대해 묻자 그녀는 '아이들에게 인권과 가족의 개념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책'이라 말하며 요즘 이런 경향의 책들이 많이 눈에 띄어 읽어보기 시작했다고 대답했었습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자
단단한 아크릴 판 위에 굵은 글씨로 쓰여 있는 그녀의 좌우명. 그녀는 저 좌우명 아래 2009년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연애
하트가 알알이 박힌 안경이 수줍은 듯 책들 사이에서 굴러 떨어집니다. 그녀는 연애란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게 만들어서 좋다고 말했습니다. 행복한 마음이 깃든 책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거니까요. 그녀는 그런 면에 있어서 연애는 책을 만들 때도 커다란 도움이 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솔로가 아닌 시점' 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으니까요. “연애는 해야 한다”라는 거지요.
너만 그런 건 아니야
물건을 정리해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고 오스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눈에 책상 한 구석에 구겨진 채로 처박힌 종이가 들어옵니다. 그 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너만 그런 건 아니야
하고 싶은 게 없다고 너무 고민하지 마.
고민되는 건 이해하지만 너만 그런 건 아니야.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선생님들이
누구나 재능과 꿈이 한가지씩은 있는 법이라고
사기를 치는 바람에 그렇지,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당신은 음악을 하지 않냐고?
나, 음악 하는 거에 대한 확신을 갖기까지 무려 15년 걸렸어.
38년 만에 겨우 하나 건진 거라구.
그렇게 쉽게 찾아지는 게 아니더라고.
- '이석원 일기' 중
음, 아무래도 그녀는 선생님의 '구라'에 직접적인 피해를 본 사람 중에 한 명인 것 같습니다. 착실하게 학교를 다니던 그녀는 졸업 후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해 방황했습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건 콤플렉스였고 들추기 곤혹스러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와중에서 '책을 만드는 일은 멋져 보인다!'라는 느낌 하나만으로 일을 시작했고, 이 일에 들어선 후에 새로운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구라다 풍선은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어요

기껏 정리한 물건들을 왜 치워 버리냐는 오스카의 말에 그녀가 대답합니다.
“2010년이잖아요.”
아아, 그렇군요. 이젠 더 이상 2009년이 아닌 겁니다. 그녀는 책상 위에 늘어놓을 2010년의 새로운 물건들을 마련하고 있는 중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다시 2010년이 지나고 새해가 다가오면, 그때 그녀는 새로운 말풍선을 준비해 2010년의 기억이 가득한 물건들을 집어넣어 보관하겠지요. 그때, 그 말풍선의 이름은 무엇이 될지 궁금할 뿐입니다.

[셀프 인터뷰] 어느 풋내기 정원사의 메멘토 :: 2009/11/27 16:52
2009년 11월의 어느 겨울밤, 홍보팀 막내 김현철 씨는 퇴근을 준비하다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콜라병 하나를 발견합니다. 평소 '위장 연중무휴' 슬로건을 부르짖으며 끊임없이 모이를 집어먹는 팩맨처럼 음식을 탐하던 그는 별다른 의심 없이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킵니다.
다음날 아침, 그는 자기 몸의 이상을 알아챕니다. 홀로 방에서 깨어난 그는 자신의 양 팔에 섬뜩한 붉은 글씨로 낙서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하지만 도대체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곰곰이 생각해보려는 찰나, 머리맡에 놓아둔 자명종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부짖습니다.
샤워를 하러 들어갔던 그가 다시 뛰어나옵니다. 양 팔 뿐만 아니라 온 몸에 낙서가 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 낙서는 아무리 비누칠을 해 박박 문질러도 지워지지가 않았습니다. 전신 거울 앞에 서서 김현철 씨는 한숨을 내쉽니다. 이 꼴로 회사에 갈 순 없는 노릇입니다. 그는 힘없이 서서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왼쪽 팔에 적힌 낙서를 바라봅니다. 그곳에는 '토트님의 이야기를 잊지 말라' 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때 그는 오래 전에 본 영화『메멘토』의 한 장면을 떠올립니다.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이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몸에 문신을 새기던 영화입니다. 도대체 김현철 씨는 뭘 잊어버렸기에 이렇게 온 몸에 낙서를 해댄 것일까요?

다짜고짜 질문질 이라니 오른팔 치고는 참 어이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김현철 씨는 곰곰이 기억을 되살립니다. 그냥 글을 쓰는 것이 좋아 대학도 국문과를 들어갔고 '국문과는 굶는다' 라는 말을 귀에 주렁주렁 매단 채 학교를 다녔습니다. 실제로 굶은 적도 없는데 매일같이 굶는다는 말을 듣고 사니 굉장히 억울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글 쓰는 직업 가운데 가장 잘 먹고 살만한 직업이 뭘까 하고 생각하다가 티비에서 김수현 선생님을 보았습니다. 성공하면 수입이 어마어마하다는 말을 듣고 대뜸 드라마 작가의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무작정 방송판에 뛰어들어 보조작가 일을 시작했습니다. 굶는다 굶는다 소리를 들으면서도 한 번도 굶어본 적 없었는데, 일하러 나갔다가 정말 처음으로 굶어봤습니다. 2달 동안 뭐가 어떻게 되는 지도 모르고 헤매던 끝에, 방송이 시작되었습니다. 티비에 이름이 떴습니다. 1월 1일이라는 특이한 생일 덕에 태어나자마자 지방 뉴스에 얼굴 비춘 이후로 두 번째였습니다.
드라마가 진행되는 반년 동안, 김현철 씨의 입과 귀는 관계자 인터뷰를 위해 방 밖으로 나가 좀처럼 돌아오지 못했고, 김현철 씨의 눈과 손가락은 인터넷 자료 검색을 위해 모니터와 키보드에 꼭 붙잡혀 있었고, 그리고 김현철 씨의 소심한 염통은 아주 쫄깃쫄깃해지도록 악플러들에게 꼭꼭 씹히고 있었고... 뭔가 복잡하고 정신없는 날들이었지만, 드라마의 시청률이 양호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쁘던 시절이었습니다. 언제나 추억은 소중하고 아름다운 거니까요. 아아, 무드셀라 증후군.
붉은 글씨가 오른쪽 손가락 엄지에서부터 기다랗게 줄을 지어 손가락을 타고 오르고 있습니다. '방송이 끝나고, 어쩌다 푸른숲에 오게 되었나?'
방송이 끝나고, 할 일이 없어졌습니다. 그는 드라마 공부를 하며 다음 작품을 준비했지만, 좀처럼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피디들에게서 '어려서인지 허울뿐인 글재주만 있고, 경험과 연륜이 없다'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글쎄요' 하며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폭탄이 떨어진 것처럼 졸업이 찾아왔습니다. 우왓, 셸 쇼크(Shell shock)라도 걸린 것처럼 해롱대는 사이 1년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폭탄보다 더 무서운 백수의 공포! 굶는 것을 증오했던 그에게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라는 격언은 저주에 가까웠습니다. 가진 게 글 쓰는 재주밖에 없다고 굳게 믿었던 그는 이번엔 광고를 해보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는 카피라이터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오지랖 좁은 자기가 애써 남에게 권하며 팔려고까지 할 만한 물건이 뭔지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그건, 책이었습니다.

그의 왼쪽 장딴지에는 '그래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적혀 있습니다.
김현철 씨는 말없이 손을 들어 장딴지를 툭, 하고 가볍게 때려봅니다. 아, 도대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요.
푸른숲에 들어온 이후, 그에게는 '오스카'라는 이름과 작은 삽이 하나 주어졌습니다. 윤기 나는 검은 깃털로 몸을 감싼 '토트' 님이 퍼덕퍼덕 날아오셔서 푸른숲 카페를 어떻게 가꾸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서평단을 운영하고, 이벤트를 기획하고, 광고에 들어갈 카피를 작성하고... 배우고 배우고 또 배웠지만 아직도 배울 것은 어마어마하게 남아있었습니다. 갓 삽에 흙을 묻히기 시작한 그로서는 토트님이 이야기해주시는 무용담은 공룡이 강원도 감자밭 한복판에 뛰어드는 것보다도 생소하고 신기한 것들이었습니다.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자라나 자기키보다도 훨씬 크게 자라버린 푸른숲의 여러 나무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푸른숲을 찾게 될지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고민 중입니다.
그의 눈에 다시 왼팔의 '토트님의 이야기를 잊지 말라'라는 문장이 들어옵니다.
도대체, 토트님의 어떤 이야기를 잊지 말라고 한 걸까요. 그때, 김현철 씨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이『메멘토』에 출연한 가이 피어스처럼 마른 근육질이라는 걸 알아챕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건 꿈이라는 이야기지요. 그때 다시 자명종이 울리기 시작합니다. 그제야 '토트님의 이야기'가 무엇인지 생각납니다.
지각하지 마세요.
눈을 뜹니다. 해가 중천입니다. 자명종은 수면 중 자체 검열이라도 했는지 자기 전에 맞춰놨던 시간보다 1시간이 느리게 걸려 있습니다. 아아, 큰일입니다. 김현철 씨는 부리나케 일어나 샤워실로 뛰어듭니다. 샤워를 하며 그는 자신의 몸에 낙서는커녕 상처 하나 없다는 걸 알아챕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샤워기를 내려 놓습니다. 적어도, 가이 피어스처럼 정신이 나가버린 건 아니니까요. 이렇게, 푸른숲 정원사 '오스카'로서의 하루가 다시 시작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