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에 해당되는 글 2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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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연금술 - 사랑 좀 해본 편집자의 기획일지 #4 :: 2010/07/26 15:53
“사랑을 잘하는 편집자가 책도 잘 만든다.” 이런 망언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어제 새로 들어온 편집자분들과 밥을 먹으며 소개팅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망언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이런 저의 망언에 입각하여 선임 편집자들이 신입 솔로 편집자들에게 소개팅을 해주는 훈훈한 광경이 연출되고야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니 저는 그렇게 생각했더랬습니다. 사랑을 알아야 편집도 하지. 그게 이 블로그 글을 쓰는 이유가 되었고요.
요즘 저는 엄기호 선생님과 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엄기호 선생님을 만나서 커피도 마시고 술도 마시고 노닥거리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선생님이 언젠가 실연을 하고 남미로 훌쩍 날아간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가는 비행기에서 헤겔과 기타 등등을 펼쳤는데 난해하고 복잡했던 헤겔의 말이 쏙쏙 들어오더란 겁니다. 짝짝짝 박수까지 쳐가며 저는 급공감을 했더랬습니다. 맞아요. 어려웠던 개념, 관계에 ‘사랑’을 넣어보면 쑥 이해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 작업 중인 원고에 사랑에 대한 멋진 글이 등장합니다.
사랑은 난생 처음 내가 타자에 의해 자아가 붕괴되는 것을 경험하게 한다. 나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고 그만이 중요하다. 모르는 존재를 향해 자신을 내던지는 것이 사랑의 경험이다. 사랑은 등가교환과 같은 것은 세상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반면 실연은 내가 가장 잘 안다고 세상에서 자부하던 사람이 순식간에 전혀 모르는 존재로 돌변하는 사건이다. 실연을 통해 사랑에 대한 체념이 아니라 상실을 감수하는 것을 배운다. […] 내가 결코 닿을 수 없는 절대적인 타자와의 만남. 이것을 통해 인간은 성장해간다. 이것이 사랑과 실연의 드라마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이번 글을 쓰기로 한 것 또한 지젝의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를 읽다가 발견한 이런 문장 때문이었습니다. “때로는 희극의 외피를 쓴 반복이 원래의 비극보다 더 끔찍할 수 있다는 것.” 아~~~ 가슴이 아립니다. 제 말을 못 믿으시겠다고요? 자 그럼 사랑의 눈으로(@_@, *_*) 이 험난한 글들을 읽어볼까요? 사랑의 연금술은 이 모든 말들이 사랑으로 읽히는 게 가능하게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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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만은 대화와 양립할 수 없다. 겸손함이 결여된 (혹은 겸손함을 잃어버린) 사람은 민중에게 다가갈 수 없으며 그들과 함께 세계를 이름 지을 수 없다. (파울로 프레이리, 《페다고지》)
‘민중’만 ‘사랑’ 또는 ‘연인’으로 바꾸면 그대로 성립하는 말이겠지요.
사진은 대상화한다. 사진은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소유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변형시켜 버린다. 그리고 사진은 일종의 연금술로서, 현실을 투명하게 보여준다고 높이 평가받는다. 때때로 우리는 사진을 통해서 뭔가를 ‘훨씬 더 잘’ 보게 되며, 혹은 적어도 그렇게 느끼게 된다. 실제로 보통보다 사물을 더 잘 보이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사진의 주요 기능들 중 하나이다.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이 역시 ‘사진’ 대신 ‘사랑’만 넣으면 성립하는 말이겠네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금에는 어떤 신비한 힘이 있어서 다른 상품들과 교환될 수 있고 그것들의 가치척도가 될 수 있는가. 그들은 다른 상품들과 비교함으로써 금의 신비를 밝히고자 했다. 애당초 가치란 그렇게 발견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가치는 한 상품이 다른 상품들과 맺는 ‘관계’이지, 한 상품에 내재한 고유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병권, 《화폐, 마법의 사중주》)
금보다 더 믿을 수 없는 신비한 힘, 그러나 사랑에 내재한 고유성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힘, 그게 바로 사랑이겠지요?
서도는 동양의 관계론적 원리가 아주 잘 녹아있는 장르입니다. 붓글씨를 쓸 때는 처음에 쓴 획의 각도가 비뚤어졌다고 그것을 지우고 다시 쓰지 못합니다. 그 다음 획을 통해 결함을 교정해야 합니다. 그것으로 안 되면 다음 획으로, 또 안 되면 다시 다음 획으로…….또 글자가 틀리면 역시 다음 글자로 고쳐야 하죠. 한 행의 잘못은 그 다음 행으로 보완하고요. 이런 식으로 고쳐가면서 쓰다 보면 글씨를 쓰는 내내 굉장히 여러 곳을 동시에 봐야 합니다. (신영복, 《여럿이 함께》)
아,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 하는 그 말이랑 어쩜 이리 똑 맞아떨어지는지요.
이번에는 사랑의 비극에 대해서 들춰볼까요?
1920년대 미국의 암흑가 보스로 악명이 높았던 알 카포네는 수많은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지만 한 번도 기소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탈세죄로 감옥에 갔다. (그레고리 맨큐, 《맨큐의 경제학》)
그렇습니다. 연애의 파탄은 아주 약한 고리에서 시작되는 법입니다.
어떤 과정이든 거기에 많은 모순이 있다면 그중에서 반드시 한 가지 모순은 주요한 것으로서 주도적, 결정적 역할을 하고 기타의 모순은 부차적이며 종속적 위치에 처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과정을 연구하든지 그것이 만약 두 가지 이상의 모순이 존재하는 복잡한 과정이라면 전력을 다하여 그 주요 모순을 찾아내야 한다. 이 주요 모순을 파악하면 일체 문제가 순순히 풀린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사회를 연구할 때 우리에게 가르쳐 준 방법이다. 레닌과 스탈린도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를 연구할 때와 소련의 경제를 연구할 때에 역시 이 방법을 보여주었다. (마오쩌둥, 《모순론》)
(이거 슬슬 억지스러움이 묻어나오기는 하나) 어떤가요? 연애의 모순. 주요 모순과 주변 모순. 지난 어떤 사랑이 떠오릅니다.
우리가 그 프레임을 부정하려면 우선 그 프레임을 떠올려야 합니다. 일찍이 리처드 닉슨은 그 진리를 뼈아픈 방식으로 깨달았습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고 그가 한창 사임 압력을 받던 당시의 일입니다. 이때 그는 TV에 나와 연설을 했는데 여기서 닉슨은 전국에다 대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그 순간 모두가 그를 사기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답니다. 이 일화는 상대편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치려면 상대편의 언어를 사용하지 말라는 프레임의 기본원칙을 가르쳐 줍니다. 상대편의 언어는 그들의 프레임을 끌고 오지, 결코 내가 원하는 프레임으로 기능하지 않습니다. (조지 레이코프,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상투적인 드라마에 종종 등장하는 장면들. 쟤가 나한테 도대체 왜 저러나 싶지만 “나, 너 안 좋아해”를 수십 번 반복하느라 그 ‘너’를 좋아하게 되는 장면 말입니다.
다음은 솔로들의 마음을 후벼 파는 멘트들 되시겠습니다.
헤지펀드는 뉴욕 증권거래소와 나스닥 시장 거래량의 40%를 점유하고 있다. 헤지펀드의 중요성은 그러나 역설적이다. 거래량에서 헤지펀드는 전체의 40%를 차지하고 있다면 이들이 소유하고 있는 주식은 겨우 4%밖에 안 된다. (존 버글, 《만국의 주주들이여, 단결하라》)
빈익빈 부익부, 사랑의 절대 법칙입니다.
‘잉여’란 여분, 불필요함, 무용함을 의미한다. - 유용성과 필수불가결함의 기준을 설정하는 필요와 유용성이 무엇이든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당신 없이도 잘 할 수 있고, 당신이 없으면 더 잘 할 수 있다. 당신이 거기 있어야 할 어떤 자명한 이유도 없고, 당신이 거기 있어야 한다고 주장할만한 어떤 뚜렷한 정당성도 없다. 잉여로 규정된다는 것은 버려져도 무방하기 때문에 버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
아, 눈물이 앞을 가려 그 어떤 말도 달지를 못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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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런 뜻이었습니다. 세상이 열리고, 세상이 무너지는 경험. 사랑만큼 강렬한 것도 없잖아요. 기쁨도 더 크게, 슬픔도 분노도 짜증도 서러움도 더 크게 만들어주는 증폭기가 사랑이니까요. 어떤 사랑을 하고 계신가요? 아니 사랑을 하고 계신가요? 그나저나 우리 신입들의 사랑은 시작될 수 있을까요? 어흥.

감정을 정리하는 어떤 방법에 관하여 - 나를 사로잡은 문장들 #3 :: 2010/07/14 17:23
#3. 감정을 정리하는 어떤 방법에 관하여
“고 군! 나 왔어. 이것 봐, 인터넷으로 주문한 캣타워가 도착했어…….”
“고 군……?”
베란다로 난 창문으로 고 군의 뒷모습이 보였다. 축 쳐진 어깨도.
“아 주인님. 오셨군요…….”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아뇨. 그냥 기분이 좀 울적해서요.”
“음. 그렇구나. 나도 오늘 좀 그랬는데. 우리 요 앞에 가서 한잔할까?”
싫다는 고 군을 끌고 집 앞 주점으로 들어갔다. 맥주와 고 군이 좋아하는 감자고로케를 시켜놓고 나는 주절주절 하루의 일과를 털어놓았다. 고 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내 말을 듣고 있었다.
“고 군. 근데 정말 아무 일 없었어?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지만…….”
“주인님, 실은 아까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가 예전에 사귀었던 친구를 만났어요.”
“아, 그때 말했던 편사고의 단짝? 헤어질 때 많이 힘들었다고 했던가, 그 친구가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여서?”
“네. 그런데 서로 안부 인사를 주고받은 후에 그 친구가 그러더라구요…….”
고 군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었다.
“미안하다고.”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고 군이 물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나직이 말했다.
“미안해. 지금까지 너를 놔주지 않았던 거…….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으면서도, 나를 잊지 못하는 네게 계속 의지한 거……. 우리 헤어지자고 한 뒤에도 넌 한결같이 나를 믿어주고 내가 부르면 달려오고 내 편이 되어주었잖아.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네가 계속 그렇게 내 곁에 있길,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어. 내 말이 얼마나 이기적으로 들리는지 알아. 정말 미안해. 이제 나에 대한 미련을 버려도 돼.”
“왜 지금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렇게 날 힘들게 해놓고?”
“고 군, 정말 미안해. 왜냐하면 이제야 알았기 때문이야. 내가 너와 같은 상황에 놓인 지금에야 네가 얼마나 힘들어했을지 알게 되었거든. 그러니까 이제 미련을 버리고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그 말을 듣고 나서 제가 바보가 된 기분이었어요. 사실 얼마 전까지도 그녀는 힘들 때면 저를 불러냈어요. 헤어졌지만 그렇게라도 인연이 유지되는 것에 대해 저는 일말의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나 봐요. 그러니까 그녀가 표현하지 않았을 뿐 저에 대한 마음이 남아 있을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바보처럼…….”
그날 밤 우리는 새벽까지 맥주를 마셨다. 나는 그냥 고 군의 얘기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고 군은 그렇게 좋아하는 고로케는 손도 대지 않고 그냥 맥주만 마셨다. 혹시나 해서 생선까스를 하나 더 주문했지만 역시나 먹지 않았다.
내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고 군은 연신 “주인님, 죄송해요. 제가 참 바보 같죠” 하고 중얼거렸다.
그날 밤 나는 잠이 오지 않아 뒤척거리다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편지를 써서 고양이 수첩에 넣어두었다.
“고 군. 우리는 모두 외로운 바보들이야. 그런 바보들의 외로움을 온전히 지켜봐줄 수 있는 건 신뿐이야. 그리고 우리는 종종 책속에서 그런 신을 만나.
고 군처럼 내가 몇 년간 한 사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을 때 내 감정을 정리하게 해준 책의 한 부분을 적었어. 고 군에게도 도움이 되길. 그리고 내일은 우리 고로케도 먹자.”
“어째서 당신만 언덕을 내려가는 거지? 불에 타 죽을 셈인가?”
“죽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서쪽엔 당신의 집이 있잖아요. 그래서 난 동쪽으로 가요.”
화염 가득한 내 시야에 까만 한 점으로 남은 그녀의 모습을, 내 눈을 찌르는 통증처럼 느끼면 나는 잠을 깼다.
눈꼬리에 눈물이 흘렀다.
내 집이 있는 방향을 향해 걷는 것조차 싫다는 그녀의 말을 이미 난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없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성에 채찍질하여, 나에 대한 그녀의 감정이 싸늘히 식어버렸다고 겉으로는 체념하고 있었다 해도, 그녀의 감정 어딘가에 나를 위한 한 방울이 있으려니 하면서 실제의 그녀와는 무관하게 오직 나 자신 제멋대로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한 자신을 호되게 냉소하면서도 은밀히 담아두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런 꿈을 꾼 걸 보면, 그녀의 마음이 눈곱만치도 내게 없다고 나 자신의 마음 구석구석까지 굳게 믿어버리고 만 것일까.
꿈은 나의 감정이다. 꿈속 그녀의 감정은, 내가 지어낸 그녀의 감정이다. 나의 감정이다. 게다가 꿈에는 감정의 허세나 허영이 없잖은가.
이런 생각에, 나는 쓸쓸했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 《손바닥 소설》 중 〈불을 향해 가는 그녀〉
[아까운 걸작] 재미 없이 의미 없다 성공보다 성장이다 :: 2010/07/13 17:37

솔직히, ‘아까운 걸작’이라기보다 ‘억울한 작품’이다. <붕가붕가레코드의 지속가능한 딴따라질>. 붕가붕가레코드라는 이 묘한 이름의 음반 기획사를 처음 알게 된 건 2008년 8월 우연히 본 신문 인터뷰에서였다. ‘재미있는 사람들이네.’ 직접 곡을 만들어 자취방에서 녹음하고, 앨범을 만들어 파는 음악인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좋아하는 일에 미치는 젊은이들. 음악뿐 아니라 자기 삶을 인디답게 만들어가는 청년들이라니, ‘의미까지 있잖아!’ 마침 ‘20대=루저’라는 이야기들이 넘치던 때였다. 많이는 안 팔려도 좋으니 재미있게 의미 있는 발언을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달라졌다. 갑자기.
‘이런 애들도 책 내네’라는 반응도 있었으니 결과적으로는 그런 오해를 완전히 떨치지는 못했다. 책은 무려 11곡이 든 CD를 붙였음에도 한 달 만에 서점에서 눈에 잘 띄는 곳이 아닌 구석에 처박혔다. 소속 밴드를 총동원한 콘서트를 마치고 책이 사라지기 시작했으니 그날 공연이 이 책의 고별 공연이 되어버린 셈이다.
책 속 이야기는 끝났지만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모두에서 성공을 꿈꾸는 이 욕심 많은 청년들의 이야기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서른을 갓 넘긴 나이에 자기 경험을 밑천 삼아 “재미 없이 의미 없다” “성공보다 성장이다”라고 감히 말하는 청년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서점으로, 음악이 궁금하다면 레코드점으로 달려가시라. 그리고 이들을 지켜보시라.

출처 시사IN
여름날의 곰스크를 좋아하세요? - 사랑 좀 해본 편집자의 기획 일지 #3 :: 2010/07/12 17:12
곰스크를 아시나요
“나는 아직도 곰스크로 가는 기차표를 사기 위해 돈을 모으고 있다”라는 말로 끝을 맺는 짧은 글이 있다. 제목도 <곰스크로 가는 기차>인 이 글은 독일사람 원작이다. 청소년 철학 교양으로 잘 알려진 안광복이 PC통신 시절에 번역해서 알렸다. 황경신은 이를 액자소설식으로 바꾸어 <페이퍼>에 실었다. 나는 군대 시절 한 후배가 그 <페이퍼>를 곱게 접어 보내준 덕분에 읽게 되었다. 많이 돌고 돌아 나에게도 왔다.
곰스크로 향하는 길, 잠시 머물려 했던 간이역에서 기차를 놓치고 그곳에 눌러 앉게 된 부부. 돈만 모이면, 조금만 상황이 나아지면 곰스크로 가리라 다짐하는 남편과 이곳도 좋으니 그곳엘 굳이 가야 하느냐는 부인. 그리고 황경신의 글에서 이 부부의 이야기를 듣고 들려주며 자신들의 삶을 반추하는 청춘을 함께 보낸 한 남자와 여자.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수많은 블로그로 확인할 수 있다).
곰스크를 향하는 것도, 지금의 그곳에 머무르는 것도 모두 둘의 선택이고 둘의 책임이다. 다만 둘의 생각이 달랐을 뿐일 것이다. 20대의 중간쯤에 이 글을 읽었을 때와 본격적으로 밥벌이란 것을 하고 나서, 그리고 그 글을 처음 읽은 뒤로 10년이 지난 지금 저마다 다른 느낌이 든다. 왜 곰스크로 떠나지 못했는가 남자를 비웃고 여자를 비난하던 때가 있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있는 것 외에 더 무얼 바라고 더 먼 곳을 가야 하느냐 남자를 비난하던 때도 있었다. 그리고 반드시 그곳이어야만 가능한 일이란 없으니 현재에서 그곳을 만들자고 나름 희망적으로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지금은 글쎄…….
버거웠으므로 벗어버렸던
감사팀. 이게 내 첫 직장에서 내가 속한 팀이었다. “쌩유 베리 감사!”는 아니고 회사가 잘 돌아가는지, 개선해야 할 일은 없는지를 조사하고 경영진에 보고하는 그런 일이었다. 감사라는 게 당연히 피감사 대상이 있어야 하고 그것은 전국의 공장, 연구소, 영업 지점이었으니 직접 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한 달의 3분의 2는 지방으로 출장을 다니고 나머지 시간에는 결과를 보고서로 정리하느라 야근하는 날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3년 반을 살던 중간에, 연애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이분도 만만치 않아 직업은 간호사. 종합병원 간호사였으니 3교대. 게다가 생사를 넘나드는 환자들도 많고 긴박한 상황이 수없이 발생하는 신경외과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주중에 서울을 비우고 주말에만 시간이 나는데 이분은 또 주말에 3교대 중 시간이 애매하게 걸리면 얼굴을 볼 수 없는 노릇. 드문드문 만나며 지냈다.
대화라는 게 초반에는 가장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이야기부터 하게 마련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더 나고 대화량이 늘어나면 보다 본질에 가까운, 그러니까 서로에 대한 감정이니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이야기도 풀리게 마련이다. 만나자마자 “넌 사랑을 믿니?” 이럴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이런 ‘아다리’ 맞추기도 어려운 데이트 일정에서 하는 이야기란 먹고사는 일에 대한 것이다. ‘ㅇㅇ지점 감사를 갔는데 장부 조사하다 보니까 빼돌린 돈이 얼마라서 징계받았다’, ‘ㅇㅇㅇ호실 환자가 밤에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 병동에 비상이 걸렸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전주에 가면 어디어디에 콩나물국밥이 맛있더라’ 같은 되도 않는 이야기로 발전하기는 쉬워도 진솔한 이야기를 풀어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땐 그랬다.
헤어졌다. 이맘때였다. 어느 날 역시 일주일치 출장을 다녀와 묵은 짐을 풀고 퍼졌다. 그분도 며칠의 야간근무를 마치고 자기 집으로 퇴근한 뒤였다. 통화를 하는데 갑자기 무기력해짐을 느꼈다. 더 이상 이 관계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그런 유. 그대로 좀 모진 방법으로 헤어지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사람에게 한 가장 나쁜 짓 중 하나다.) 삶이 버겁다고 해야 하나. 왜 이러고 사나 싶기도 했고. 덜컥 겁이 났다. 아무튼 비겁한 것이었다. 사랑만 말하고 살아도 아까운 시절에 둘이 마주 앉아 영수증과 통장 잔고와 카드 명세서 등을 놓고 계산기를 두드리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비극으로 여겨졌다.
나의 곰스크, 당신의 곰스크
작년 이맘 때 나는 결혼을 하여 본격 “영수증과 통장 잔고와 카드 명세서 등을 놓고 계산기를 두드려야 하는” 삶을 시작하였다. 수북이 쌓인 부부의 한 달치 술값의 증거들을 보며 반성회를 하다가, 조금씩 늘어가는 통장 잔고를 보며 각자의 위시리스트를 살~짝 프리젠테이션하기도 하는 그런 시절을 사는 것이다.
나는 곰스크 행을 포기한 여인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인가. 잘 팔리는 책을 연이어 내놓는 획기적인 편집자가 되어, 수입의 총량을 늘려 수입 대비 음주비 지출을 낮추는 획기적인 방법을 떠올리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반대로 팍팍했던 감사팀 시절을 벗어나 일과 삶이 대체로 일치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이라 만족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바로 그맘때 만들기로 한 책들을 보니 지나간 연애와 곰스크와……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팜 시티>. 시애틀의 슬럼에서 직접 벌을 치고 돼지를 기르는 사람의 에세이다. <콜드>. 지구가 얼마나 추운지 직접 경험해보겠다 북극 근처에서 1년을 산 어느 과학자의 에세이다. <최후의 모험가>도 이때 찾은 책이다. 열기구를 타고 세계일주를 하는 게 꿈인, 그러나 태평양 상공에서 실종된 모험가를 다룬 논픽션이다.
바로 그맘때 눈에 잘 띄지 않는 이런 책들이 눈에 들어온 건 나 역시 어떤 곰스크를 마음에 그리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저마다의 곰스크를 찾아 떠난 사람들, 저마다의 곰스크에 도착한 사람들. 그들을 지켜보리라 하는 마음. 그리고 그러그러한 마음이 들 때 이 책을 읽는다면 나의 곰스크는 어디에 있는가, 아니 너의 곰스크가 있었다는, 그곳을 바라고 그리워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고 다짐하리라는 마음 말이다.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PS. 이 책들은 아직 출간하지 않았다. 퍼뜩 카테고리 이름은 <곰스크>라고 지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터뷰] Qui est-elle? (그녀는 누구입니까?) :: 2010/07/08 16:57
문학교양팀이 있는 푸른숲 3층은 언제나 조용합니다.
가끔 걸려오는 전화벨 소리조차 큰 소리를 내는 것이 조심스러워 나지막하게 울리지요.
편집자들은 책이 가득 차 있는 책장 너머에 자리를 틀고 각자 사랑하는 책과 밀담을 나누느라 바쁩니다.
숨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 그리고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 약간.
숨을 들이쉬고 조용히 입을 열어봅니다.
"Excusez-moi(실례합니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멈춥니다.
그리고 책장 너머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이윽고 책장 위로 그녀가 고개를 내밉니다.
그녀가 웃으며 말합니다.
"Bonjour~(안녕하세요)!"
아, 순간 저는 학교 다닐 때 배웠던 제2외국어가 불어가 아닌 중국어였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어줍잖은 불어 실력이 들통나기 전에, 황급히 한국어로 인터뷰를 진행하기 시작했어요.

ses débuts (시작)
"대학 때부터 번역가가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번역 일이 그렇게 많은 게 아니라서, 번역 아르바이트와 고등학교 불어 교사를 병행하며 생활했어요.
그러다가 출판사에서 편집자를 구한다는 공고를 보게 됐어요.
그 출판사는 제 컴퓨터 즐겨찾기 폴더에 들어 있던 2개의 출판사 중 하나였지요.
평소 즐겨 읽던 책을 내는 곳이어서 자연스럽게 지원하게 되었어요."
Moments de Bonheur (행복의 순간)
그녀는 아직도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책 인쇄용 필름을 들여다보던 밤을 기억합니다.
사무실의 고요함, 아스라이 얼굴을 비추던 필름 투사용 형광등 불빛, 맨발바닥에 느껴지는 약간 싸늘했던 바닥의 감촉,
그리고 무엇보다 '책의 한 부분이 된 듯한' 느낌이 그녀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녀는 그때 책을 만드는 순수한 기쁨을 느꼈다고 합니다.
Forêt vert (푸른숲)
"그런데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매너리즘에 빠지더라고요.
만들고 싶은 책을 제대로 만들어내야겠다는 의지가 점점 사라지는 그런 느낌?
변화가 필요했어요. 문학에 국한되지 않은 다양한 책을 만들고, 접하고 싶었죠.
그때 즐겨찾기 폴더 속에 있던 2개 출판사 중 나머지 한 출판사에서 구인 공고가 났어요. 그게 바로 푸른숲이었죠.
지금도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가장 좋아하던 두 출판사에서 일할 수 있었다는 게."
Sens d'un livre (책의 의미)
그녀에게 있어 책은 '멘토'이자 '현실과 꿈의 경계'라고 합니다.
그녀는 책 속에서 굳이 현실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대신 책 안에서 나만의 이야기를 찾는 걸 즐긴다고 해요.
"온다 리쿠의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나와요.
편집자 두 명이 여행을 하던 중에 좋은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죠.
- 좋은 소설이 뭐라고 생각해?
- 읽으면서 나도 쓰고 있는 느낌이 드는 책.
저도 좋은 책은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읽으면서 내가 쓸 다른 이야기가 보이는 책.
독자와 저자 사이의 화학작용이 이루어지는 그런 책.
"나는 이래, 너는 어때?" 하면서 질문을 던져오는 그런 책이 좋아요.
"네 얘기를 들려줘" 하고 조르는 그런 책을 만들고 싶고요."

Livre préféré (사랑하는 책)
감명깊게 읽은 책을 골라달라는 말에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밀란 쿤데라의 《불멸》과 지금 교정을 보고 있는 제프리 무어의 《붉은 장미 사슬의 죄수》를 꼽았습니다.
"《불멸》에는 자신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자신의 자아에서 외적인 것들을 모두 제해나가는 언니와,
반대로 자신의 자아를 좀 더 잘 보이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외부의 새로운 것들을 덧붙이는 동생이 나오죠.
삶을 대하는 인간의 각기 다른 태도에 대해 이해하는 계기가 되어준 책이에요.
《붉은 장미 사슬의 죄수》는 우리 회사 책이어서가 아니라,
교정을 보면서 정말 '작업'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고 이야기 속에 빠져드는 느낌을 준 소설이었어요.
사랑에 빠진 남자의 심리를 보여주면서 가장 이해 못 할 것 같았던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을 보여주지요.
영화 <500일의 썸머>의 진지한 버전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Découverte d'auteurs (저자의 발견)
"저자를 섭외하는 과정은 참 다양해요.
블로그에 올린 글을 보고 연락하는 때도 있고, 칼럼이나 투고작, 인터뷰 기사를 보고 섭외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 외에도 저자가 다른 저자를 추천해준다거나, 강연회에 들렀다가 좋은 저자분을 만나는 경우도 있고요.
편집 일은 여러모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그들을 이해하는 '+적 마인드'가 필요한 직업 같아요."
Livres inoubliables (기억에 남는 책)
그녀는 만든 책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 뭐냐는 질문에 가장 긴 고민을 했습니다.
"한 권을 딱 꼽기 힘들어요."
한참 생각하던 그녀는 두 권의 책을 이야기했습니다.
"한비야 선생님의 《그건, 사랑이었네》는 책의 영향력을 눈 앞에서 보여준 책이었어요.
선생님의 강연회나 사인회에 가면, 10년 전 선생님의 책을 읽었던 사람들이 찾아와요.
그들이 하는 말은 "책이 감동적이었어요" 같은 간단한 말이 아니에요.
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건 책 덕분에 변한 자신의 삶이죠.
직장 때문에 고민하던 청년이 선생님의 책을 읽고 야학 교사가 되었다고 고백해요.
강연회 자리에서 책과 함께 성장한 수많은 독자들을 만날 수 있었지요.
최범석 선생님의 《최범석의 아이디어》는 처음으로 만든 국내 저자의 책이었어요.
소설을 할 때는 그저 작가가 글 안에 담고 있는 메시지를 어떻게 풀어낼까, 작가를 어떻게 소개할까만을 고민했다면,
이 책을 만들 때는 책 안의 다양한 요소를 디자인해간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어요.
책의 컨셉에서부터 구성, 이미지의 배열, 부속물 등 사소한 것들까지 참여하고 협력해서 결정해가는 과정이 너무 신선했지요."

Espoir (소망)
2010년도 이제 절반 남은 시점에서,
그녀는 남은 반 년 동안 이루고 싶은 소망으로
'나만의 공간'을 꼽았습니다.
"꼭 작업실 같은 물리적인 공간이라기보다는,
그 안에서 뭔가에 몰두할 수 있고, 순수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걸 찾고 싶어요.
여행도 될 수 있고, 연애도 될 수 있고, 미술관을 찾아가거나, 공부를 시작하는 것일 수도 있죠."

예전엔 휴식의 공간이었던 서점이 이제'업무의 장소'가 되어버린 게 아쉽다는 그녀.
'어떤 제목이 좋을까? 어떤 표지가 좋을까? 어떤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지?'라는 고민에서 벗어나
순수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그녀만의 공간을 찾기를 기원해봅니다.
고양이 수첩 - 나를 사로잡은 문장들 #2 :: 2010/06/25 11:12
#2. 고양이 수첩

“뭘 보고 있는 거야? 눈은 충혈돼 가지고…….”
고 군이 쑥스러운 듯 교정지 아래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오드리 헵번? 고양이도 이런 걸 좋아한달 말야?”
“예전 주인님이 밤마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보셨거든요…….”
“창가에서 기타 치며 <문 리버> 부르던 헵번은 정말 근사했지? 근데 전 주인은 어떤 사람?”
“아주 활발한 남자 분이었어요. 새로운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고, 한번 책 얘기를 시작하시면 끝날 줄을 몰랐죠.”
“흠, 고 군은 나 말고도 주인이 여럿 있었지, 난 고양이라곤 고 군이 처음인데 말야. 왠지 기분이…….”
“하지만 지금 저의 주인님은 카스테라 님이니까요. 그렇게 서운해하실 건…….”
그렇게 말하는 고 군의 입 주위가 살짝 씰룩거렸다. 왠지 좋아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데 말야, 오늘은 고 군이 좋아하는 책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어때?”
“하지만 제가 여기 온 건,”
“그러니까 내가 회복되기 위해선 고 군의 이야기가 필요하다구.”
나는 음흉하게 씨익 웃었다.
“아, 그러시다면 잠시만요.”
고 군이 테이블 옆의 보자기에서 수첩을 하나 꺼냈다.
“제가 좋아하는 문장을 적어놓은 수첩입지요.”
고 군의 얼굴에 자랑스러운 표정이 퍼져나갔다.
“흠흠. 제가 읽어드리는 구절이 어느 책에서 나온 건지 알아맞히시면 계속 읽어드릴게요. 틀릴 경우 주인님 차례가 되는 거구요.”
“그래, 읽어봐.”
“신기해요. 어떤 음악을 들으면, 그 곳을 제게 처음 알려준 사람이 생각나요. 그것도 번번이요. 처음 가본 길, 처음 읽은 책도 마찬가지고요. 세상에 그런 게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떠올라요. '이름을 알려준 사람의 이름'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건 사물에 영원히 달라붙어버리는 것 같아요.”
“김애란, <너의 여름은 어떠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고.”
“앗, 역시 주인님. 이번엔 좀 어려운 걸로.”
“훗, 해보시지.”
“이 거리는 아샤 라시스 거리라 불린다. 엔지니어인 그녀가 저자 속에 그 길을 놓았다.”
“…….”
“모르시겠어요?”
“응…….”
“발터 벤야민의 <일방통행로>에 나오는 구절이랍니다. 벤야민은 친구의 연인인 아샤를 흠모해서 이런 헌사를 바쳤어요. 정말 낭만적이지요?”
‘이런 유식한 고양이 같으니라고.’
“좋아, 그럼 내 차례군. 난 고 군처럼 수첩이 없어서 정확히는 기억을 못 하는데, 정말 가슴이 저릿했던 한 문장이 있어. 두 명의 친구가 오랜만에 만났어. 기억이 안 나니 A와 B라고 할게. 아마 A의 직장으로 고향 친구인 B가 찾아와 오랜만에 재회한 상황이었던 것 같아. 둘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고, A는 바빠 죽겠는데 이야기를 마친 B가 화장실에서 이를 닦는다고 하더니 아주 오래오래 칫솔질을 하는 거야. 잇몸 다 닳겠다, 짜증이 솟구친 A가 한마디 하자, B가 이렇게 대답해. '내가 이를 다 닦으면 너 갈 거잖아.' 그때 그 한 구절이 정말 어찌나 가슴에 콕 박히던지. 나도 그런 적이 있었거든. 대학 때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난 좀 외톨이였던 반면 그 친구는 인기도 많고 온갖 동아리 활동을 하며 대학생활을 즐기던 중이었지. 그 애가 한번 시간을 내서 만나면 나는 헤어질 시간을 늦추고 싶어서 괜히 무슨 할 말이 있는 양 우물쭈물하곤 했어. 자존심 때문에 나랑 더 있어달라곤 차마 말 못 하고 그냥 오래오래 시간을 끄는 거지. 느릿느릿 안녕을 고하려고.”
“네, 저도 읽은 기억이 나요. 단편소설이었는데 신경숙 작가인가.”
“딩동댕. 맞힌 걸로 할게. 사실 나도 소설 제목은 기억이 안 나거든. 고 군은 다독가구나.”
“호홋, 뭘요. 그럼 주인님, 하나 더 부탁드려요.”
“음. 그러고 보니 나도 최근에 다이어리에 적어놓은 구절이 있어. 잠시만…… 여기 있다. ‘매그니토가 사악한 존재가 된 것은 오랫동안 슬픔과 증오에 휩싸여 살았던 결과입니다. (...) 그의 증오와 슬픔은 처음에는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들에 영향을 미치는 '우리의 외부' 대상들이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중요한 건 결국 그 감정들이 우리의 '내면에 일으킨 결과입니다.’”
“전혀 모르겠는데요. 철학책인 것 같은데…….”
“응. 내가 최근에 교정보다가 적어놓은 거야. 내게 더할 수 없는 위안을 준 동시에 오랜 친구 하나를 잃게 한 구절이지…….”
“이런 곳에 들어오려던 게 아니었어.”
돌잔치로 주위가 떠들썩한 어느 레스토랑에서 그렇게 말하며 난색을 표하던 그 애의 얼굴이 기억난다. 난 뭐 별로 상관없어. 조용한 편보다는 그 편이 덜 어색하잖아.
어쨌든 나는 타이밍을 맞추는 데는 쥐약이었다. 어쩌면 좋은 타이밍을 망치는 데 소질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고 상대와 나와의 간극을 메우기보다는, 직구를 던지고 게임을 끝내버리는 일방적인 사람에 가까웠던 것 같다. 나를 잘 아는 사람들조차 이런 내 모습에 종종 놀랄 정도로.
그러면서도 한 가지 믿고 있는 표지 같은 게 있었다. 그즈음 나를 사로잡고 있는 어떤 것(어떤 문장, 어떤 음악, 어떤 장소……)에 반응하는 상대의 모습을 보며 조심스레 나와 맞는 사람인지 점쳐보는 습관. 그날 그 자리에서도 어김없이 내가 편집하던 철학책의 한 단락이 불쑥 튀어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이건 좋지 않아. 마음속에서 그런 소리가 들렸지만 늦었다.
“나 최근에 참 못나게 살았다. 그러니까 상황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내 앞에 혹은 주위에 기쁜 일이 생겨도 기뻐하지 못하고, 조금만 기대하지 않은 일이 생겨도 확 방어막을 쳐버려. 최근에 이런 글을 읽었어. 어떤 사람의 증오와 슬픔이 처음엔 아무리 정당했다 하더라도……중요한 건 결국 그 감정들이 우리 ‘내면에 일으킨’ 결과라는 것.’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마음고생을 하던 때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까지는 내게 닥친 일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 발버둥을 치다가, 마지막 한 방이 왔을 때는 그러기도 싫을 정도가 되었다. 팔짱을 끼고 매섭게 세상을 노려보다가, 나동그라져 이내 손을 놓아버렸다. 내가 믿는 신에게 손 내밀 힘조차 없었다, 아니, 그러기 싫었다. 나를 사로잡은 감정은 점차 대상을 알 수 없는 분노로 변해서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날을 세웠다. 삼십 넘어 이 무슨 사춘기인가.
그런데 순전히 일로 만난 철학책 속의 한 구절이 가슴을 세차게 때렸다. 나의 슬픔이 아무리 정당한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 중요한 건 슬픔이 내 안에 들어와 일으킨 결과다. 그 문장이 바닥까지 내려갔던 나를 구원해주었던 것 같다.
처음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야. 지금 그 슬픔이 너를 어떤 상태로 끌고 가고 있는지 눈을 똑바로 뜨고 봐야 해. 그런 일이 일어난 이유에 집착하는 건 멍청한 짓이야. 슬픔에게 먹히기 전에 빠져나와! 죽을 것 같아도……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교정을 보는데 눈앞이 흐려졌다.
떠들썩한 소음을 뒤로하고, 오랜 친구가 더는 친구가 아니었던 그날, 나는 작은 목소리로 나를 이해해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전달되지 않았다.
내가 전하려던 건 그게 아니었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 아이의 피로한 눈에서 나의 말이 그저 튕겨나가고 있는 것을 보며 나는 입을 다물었다.
최악의 타이밍. 책에서 받은 위로는 책에서 끝내는 편이 좋다. 이해받지 못한, 공유되지 못한 소중한 감정은 이내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고 만다.
우리는 서로의 힘든 상황을 알았다. 십오 년 동안 우리가 겪은 일들, 보이기 싫은 구석들을 보이고 이해하는 데 길들여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서로의 스무 살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착하고 순수하고 상대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아이, 장난기 많고 순정만화를 좋아하고 자신감이 충만한 아이. 하지만 이제 더는 그렇지 않다는 걸 서로 알았다. 머리가 굵어졌고, 세상을 보는 시선도, 살아가는 방식도 달라졌다.
그 레스토랑 앞을 지날 때마다 되묻곤 했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도 순전한 눈빛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저 들어주었다면 달라졌을까?
“주인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어, 뭐라고?”
“무슨 책인지 모르겠어요. 제목을 알려주세요. 궁금해서…….”
“아, 그래. '스튜디오 필로, 철학이 젊음에 답하다'라는 책이야. 난 철학책이 머리가 아닌 내 삶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
“아, 네. 적어두겠습니다.”
고 군은 고양이 수첩에 연필로 꾹꾹 눌러 책 제목을 적었다.
고 군,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편집자는 다만 거들 뿐 - 사랑 좀 해본 편집자의 기획 일지 #2 :: 2010/06/15 14:11
그렇다. 이것은 굴욕이다. 히스 레저의 사진을 잭 니콜슨에게 내밀어 사인을 해달라니. 저 눈빛을 보라. 그러나 굴욕감을 느낀 게 잭 니콜슨뿐이었을까. 저 사진과 펜을 내민 저 저 사람, 저 사람도 집에 가서 엉엉 울었을지도 모른다. 아, 잭 니콜슨과 히스 레저를 구분하지 못하고 들이미는 엄청난 실수를 하다니 하면서 엉엉 울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저 사진의 ‘손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손발이 오그라든 이유도 편집자 일을 하면서 제안의 과정 속에서 실수를 종종 하기 때문이다. 주전공이 전혀 다른 분야인 사람에게 이런 거 써보면 어떨까요 제안을 하기도 했다. 그분의 포지션과 강점이 A인데 시장에서 원하는 게 B니 거기에 맞게 써달라 되도 않는 제안을 하기도 한다(그럼 B처럼 쓸 수 있는 사람을 찾으면 될 일이 아닌가. 게으른 탓일 테다).
첫 책의 쌉싸롬한 기억
첫 책을 만들 때는 특히 중요한 실수가 많았다. 문제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교정 문제. 저자는 나름 자기만의 문체가 있는데 비문이라면 고치겠지만 그런 것도 아닌데 문장에 일일이 손대는 것을 거부했다. 나중에야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요즘엔 편집자들마다 말랑말랑하게 써달라고 조르는데, 저자에 맞게 잘 포장해서 내는 게 아니라 모든 저자를 한 가지 틀에 맞춰서 책을 만드는 걸 보니 참, 놀랍다.”
더 중요한 문제는 구성이었다. 사실 그 책은 원고가 거의 완성된 상태에서 계약을 했다. 그런데 시의성 있는 내용인데다 저자의 지명도도 있으니 현실 경제 문제를 비판하는 원래 원고에 경제학 용어 설명이나 경제학 이론을 덧붙이면 좋겠다는 의견. 그러나 저자 입장에서 그것은 군더더기일 뿐이라며며 반대했다. 결국은 저자가 원하는 방향대로 진행이 되긴 했으나 저자도 심기가 불편하고 편집자도 일정과 상황에 밀려 지고 들어갔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은 상태에서 책이 나오게 되었다.
책이 잘 나오고 안 나오고를 떠나서 그 사람이 할 수 없는 것, 하기 싫은 것을 권하는 일은 고역이고 또한 무례함, 무지함이다. 그것이 특히 어떤 기준을 정해놓고 그 사람을 내 기준에 끼워 맞추려 할 때 더더욱 슬픈 일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을 할 때 더욱 크게 드러난다.
사랑은 독립성에 관한 상호동의이다
사랑에 관한 개똥철학은 무수히 많지만, 미처 사랑을 해보기도 전에 꽂혔던 말이 있다. 대학교 1학년 때 학교 중앙도서관을 기웃거리다 어느 서가에서 발견한 프랑스 소설에서였다. 68세대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었는데 제목도, 작가도 기억나지 않지만 첫 문장만은 아직 선명하다. “사랑은 서로의 독립성에 관한 상호동의이다.” 사랑이라 함은 자고로 말랑말랑하고 몽글몽글한 말들이어야 하는데 독립, 상호, 동의라는 말로도 정의할 수 있구나, 우와. 괜히 멋져 보였다. 그러나 폼이라도 잡으려고 “이 말 멋있지 않냐?”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꺼내면 십중팔구 “그럴 거면 뭐하러 사귀냐. 놔주지” 하는 대답이 돌아오게 마련이다. 사랑을 하되 독립성을 인정하기. 참 어려운 일이다.
결혼을 하고 보니 그게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색시에게 얼마 전에 더 재미있는 일을 하는 회사에서 더 좋은 조건에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걱정거리는 지금보다 더 바빠질게 뻔하다는 것. 안 그래도 주중에는 자는 시간 외에는 일만 하는데 더더욱 여유는 사라지겠구나. 둘이 소맥을 말아 마시며 했던 고민의 요체는 그것이었다.
나나 그분이나 각자 한두 번씩 정말 하기 싫은 일을 피해, 또는 더 잘할 수 있는 일을 택하기 위해 인생 경로를 뒤튼 경험이 있었다. 그때마다 서로 말린 적은 없었다. “더 재밌을 것 같아?”,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따위를 묻고 답이 예스라면 재밌을 거라는데, 하고 싶다는데 말릴 이유는 딱히 없었다. 하고 싶은데 못하는 것은 당사자가 감내해야 하는 일이고 해야 하는데 못하는 것은 상대방에서 감당하고 대신 해주면 될 일이다. 상대방의 선택을 인정하는 것, 그것을 신뢰하는 것이 바로 독립성에 대한 동의가 아닐까.
편집자는 다만 거들 뿐
앞서 말한 책에서 실수했던 것도 바로 그 지점이었을 것이다. 내가 감당하지도 못할 거면서 더 잘 팔릴 수 있다는 기대로 이 사람이 왜 책을 쓰려 하는가,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부족했다. 최후의 기획자는 저자, 편집자는 슬램덩크의 명대사 “왼손은 다만 거들 뿐”이라는 말처럼 바로 그 왼손 역할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지금 만드는 책은 그런 실수를 피하려 애쓰는 중이다. ‘대한민국 20대에 관한 인류학적 보고서’라는 부제를 달고 집필 중인 책이다. 저자는 20대와 함께 공부하고 연구하고 활동하는 활동가 겸 학자다. 저자는 한 꼭지 한 꼭지 원고를 메일로 전송 중이다. 그러면 나는 꼭지마다 내가 생각하는 바를 정리해서 저자에게 전달하는 식으로 원고를 진행하고 있다. 그때마다 고민의 기준을 다시 되새긴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가 하려는 것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는가.
*추신.
정신없는 일필휘지
용두사미 어리둥절
이건 무슨 글일까요
사죄하는 마음으로
시 한 수를 바칩니다
그의 행복을 기도드리는
신동엽
그의 행복을 기도드리는 유일한 사람이 되자.
그의 파랑새처럼 여린 목숨이 애쓰지 않고 살아가도록
길을 도와주는 머슴이 되자.
그는 살아가고 싶어서 심장이 팔뜨닥거리고 눈이 우물처럼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의 그림자도 아니며 없어질 실재도 아닌 것이다.
그는 저기 태양을 우러러 따라가는 해바라기와 같이 독립된
하나의 어여쁘고 싶은 목숨인 것이다.
어여쁘고 싶은 그의 목숨에 끄나풀이 되어선 못쓴다.
당길 힘이 없으면 끊어버리자.
그리하여 싶으도록 걸어가는 그의 검은 눈동자의 행복을
기도드리는 유일한 사람이 되자.
그는 다만 나와 인연이 있었던
어여쁘고 깨끗이 살아가고 싶어하는 정한 몸알일 따름.
그리하여 만에 혹 머언 훗날 나의 영역이 커져
그의 사는 세상까지 미치면 그때
순리로 합칠 날 있을지도 모를 일일께며.

푸른숲 직원들의 이야기 - 오픈캐스트 발행 :: 2010/06/04 17:56
내게 거짓말을 해봐 - 사랑 좀 해본 편집자의 기획 일지 #1 :: 2010/05/31 17:23
비겁의 연대기
1997년 5월 31일, 정확하게 13년 전 오늘이다. 나는 대학교 2학년이었고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는 그날 이제는 이름도 잊힌 한총련 출범식이 열릴 예정이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못 열릴 상황에 놓였다고 해야 맞다. 학교는 여남은 개의 출입구는 물론 ‘개구멍’까지 경찰들에 막혀 완전히 ‘밀봉’ 상태였다. 깔린 경찰만 2만이라고 했다. 학교 앞 지하철역은 물론 앞뒤 두 개 역까지 모조리 입구를 봉쇄당해 전국에서 올라온 대학생들은 우리 학교로 진입하지 못한 채 서울 시내 곳곳의 학교에 흩어져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학교 안에서도 전경들을 뚫어보겠다고 별별 일들을 다했으나 틈만 나면 지랄탄과 최루탄을 쏘아대는 바람에 몇몇 친구들은 피부가 짓무를 정도였다.
이렇게까지 말하고 보니 내가 무슨 영웅적인 전술로 이 밀봉을 뚫었다, 얘기해야 이야기가 술술 풀리겠으나 사실 나는 ‘그때 그곳’에 없었다. 5월 30일부터 6월 1일까지, 나는 학교에서 한 이십 분쯤 떨어진 자취방에 머물렀다. 여자 친구 자취방에서 2박 3일을 보낸 것이다. 몸이 워낙에 약하고 자주 아팠던 여자 친구는 마침 또 몸살이 찾아왔다. 남자 친구라고 하나 있는 것이 한 달에 술을 얼마나 먹나 시험해보겠다고 술을 마셔대며 연애에도 공부에도 무관심했으니, 몸살이 나도 진작 났을 일이다.
미안한 마음에 아침에 찾아가 밥 차려 먹이고 약 지어 먹이고 학교로 향할 예정이었다. 어쩌면 무슨 영화마냥 비장한 각오를 다지기 위해 마지막 인사라도 하고 떠나올 심산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이 아팠다.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는데 열이 심했다. 열이 좀 내려가는 걸 보고 가겠단 생각에 옆에 누웠다 잠이 들었는데 어느새 저녁. 5시 뉴스 등에도 출범식 관련 소식이 나왔다. 행사 전날이 되니 출입구를 확보하려는 학생들도 과격해지고, 전경들도 여느 때와 다르게 물러섬 없이 진압을 했다. 아, 이것은 ‘한양대 vs 성동서’의 지역구 싸움하고는 판이 달랐던 것이다. 솔직히 겁이 났다. 아무리 그 학교 재학생이라지만 이 격전장을 굳이 들어가겠다는 사람을 수상하게 보지 않는 경찰이 있다면 그것은 직무유기인 셈이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
여자 친구는 몸에서 열이 빠져나가는 대신 이성이 들어차기 시작했나 보다. 그 녀석이 나를 붙잡았다. 아니 그 녀석의 말을 핑계로 삼아 들어가기를 포기했다는 게 조금 더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저길 꼭 가야 돼?” 여기까지만 해도 괜찮았으나 다음 한마디, “나를 두고?” 바로 그 한마디에 발목이 잡힌 것이다.
그 녀석을 설득해야 했다. 전국에서 학생들이 기어이 올라와, 기어이 한군데 모여 집회를 하겠다는 게 일단 이해불가, 그런다고 세상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순진한 것, 그리고 그걸 꼭 왜 니가 해야 하는가……. 이런 유의 대화란 교회 다니는 친구에게 진화론을 설득해야 하는 끝이 보이지 않는 논쟁의 세계다.
대화가 밤을 새고 다음 날이 되었을 즈음엔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나를 가장 사랑한다는 사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하나에게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그것이 옳다고 믿으며 그리하여 그로써 세상을 조금이나마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으로 만들어보겠다는 신념을 설득하지 못하는데 저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저 아이 하나를 설득하지 못하면서 무슨 세상을 바꾼단 말인가. 그것은 학생회 활동이나 사회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정작 보수적인 부모님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숨기는 선배들의 모습을 보고 늘상 들었던 생각이기도 했다. 역시나 다만 겁이 났을 뿐. 모든 것은 핑계였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바꾸는 것도, 그런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것도, 그런 꿈을 꾸는 것도 좋은데 겁이 나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계삼의 말처럼 “변혁의 열망으로 치장했으나 다만 소박한 우정의 근거지를 위해” 그렇게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재미 없이 의미 없다
(자, 이제 기획 이야기로 돌아가 아전인수, 견강부회를 해야 할 시간이다.)
종종 사장님께서 외부 인사들을 만날 때 그런 말씀을 하신다. 신문을 읽다가, 지인을 만났다가 이런 거 만들어보면 어떨까 편집자들에게 자료를 주시곤 하는데 아이템 회의를 통과하기 참 어렵다고. (아…… 회사 생활은 어려운 것이다.) 나 역시 이러저러한 글을 보고, 사람을 만나고 이런 책을 해보고 싶습니다, 아이템 회의를 자주 하는 편이다. 승률이 낮은 편은 아니나 최근에 실패한 책이 하나 있다.
꿀벌에 대한 책이었다. 꿀벌의 생태와 경영의 팁을 연관 지어 설명하는 그런 책이다. 로버트 그린의 《전쟁의 기술》《권력의 법칙》이나 정진홍의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같은 책들을 보면 세상만사가 경영의 지혜로 포장된다. 만물은 경제경영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다. 그래서 생체모방도 하는 마당에 다른 생물들의 생존 전략을 경영전략 책으로 만들어보자, 이런 게 책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샘플 원서를 받아서 번역자에게 전달, 번역자에게 발췌번역을 받아서 기획안 작성, 그리고 아이템 회의. 이게 순서다. 그런데 번역자가 딴지를 건다. 한마디로 함량미달. 사실 이런 경우에 “아, 그렇군요” 하면서 쿨하게 킬하고 다른 책을 찾으면 될 일이다. 하지만 나는 내 방향이 맞다고 생각했다. 내용 자체보다 컨셉이 살아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막연한 믿음도 있었다. 세상이 마치 이런 책을 기다리고 있기라도 하는 양, 이 책을 만들지 않으면 무슨 큰일이라도 나는 양.
그런데 이게 샘플 번역을 받아서 기획안을 쓰다 보니 뭔가 꺼림칙했다. 한마디로 찔렸다. 자랑할 것이 많은데 하지 못하고 참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자랑할 게 없는 것을 부러 만들어내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내가 이 책을 돈 주고 사서 볼 것 같지 않은데 누구 보고 읽으라고 이런 책을 만들겠다는 것이냐, 이것이 기획안을 쓰면서 내내 머릿속에 들었던 생각이다. 그래도 바보 같이 ‘회의는 해보자, 다른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할지도 모른다’며 기획안을 만들어 회의를 소집했다. 다른 사람들은 바보 같지 않았다.
나는 최초의 독자이니
사실 내 마음에 드는 책은 기획안부터 잘 써진다. 내가 왜 이것을 하고 싶은지, 이 책(저자)은 어떤 강점이 있는지, 어떤 사람이 읽을지, 바로 그 독자에게 어떤 가치를 줄 수 있고 주고 싶은지, 어떤 책 옆에 놓고 판매할 수 있는지 일사천리로 기획안이 써지는 것이다(사실 그럴 때 기획안은 날림으로 써도 타율이 좋다). 이미 나는 그 책에 설득당했으니 뭐에 홀린 사람마냥 전도만 잘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꿀벌’ 같은 책은 기획안을 만드는 과정, 회의를 하는 과정 자체가 나를 설득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준비되지 않은 회의, 준비되지 않은 기획은 옆에서 봐도 티가 나는 일이니 상대방을 설득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정리한 원칙은 그래서 바로 이런 것이다. “나는 최초의 독자, 내가 재미없으면 남도 재미없다. 아니 최소한 재미있게 만들 수 없으면서 사서 읽어보라고 남에게 건넬 수 없다. 그런 책은 만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에게 재미있는 책을 만든다.” 그렇지 않은 책이라면 그것을 기쁘게 읽고 잘 만들 주인을 찾아가게 될 것이다. (물론 마음에 들지 않는 책, 편집자의 생각이 저자의 가치관과 접점을 찾을 수 없는 책도 기술적으로 잘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 편집자이기는 하다.)
그래서 트위터라는 것을 하면서 자기소개에 이런 말을 써놓고 트위터를 들어갈 때마다 그 글을 보면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려고 끼적대며 궁리를 할 때마다 새기곤 한다. “푸른숲에서 책을 만듭니다. 내가 궁금하고 내가 읽고 싶은 책만 만들고 싶은…….”
*후일담. 그해 초여름 과 선배 한 명은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당했다. 여전히 교문이 굳게 닫혀 있던 6월 초순 학내에 있던 시민을 학생들이 조사하는 과정에서 폭행사망 사건이 발생했다. 한마당이라 불리는 학교 깊숙한 곳까지 전경 버스가 들어와 현장 조사를 벌였다. 총학 간부 대여섯이 구속되었다.
나는 다음 해 과 학생회장이 되었다. 여자 친구는 있는 듯 없는 듯 잘 참아주더니 나의 임기가 끝난 다음 날, 조용히 나를 불러 헤어지자고 했다. 나는 그러마고 했다.

[투표] 푸른숲 사람들의 어떤 이야기가 듣고 싶으세요? :: 2010/05/25 10:23
블로그는 항상 흥미로운 글에 목마르다
회사 블로그를 운영하면 늘상 좋은 콘텐츠에 목마르게 됩니다. 블로그를 개설하면서 많은 코너를 기획하지만 역시나 가장 좋은 글은 퍼나르는 글이 아닌 자체적으로 직원분들이 써 주시는 콘텐츠인데요. 푸른숲 출판사도 매 달 인터뷰와 정원사(직원)글을 받고는 있지만 기대를 충족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죠.
이번에 홍보팀에서 푸른숲 직원분들께 자신이 재미있게 쓸 수 있는 이갸기는 무엇인지 설문으로 받았습니다. 아래에 간단히 정리하였는데, 지금 푸른숲 카페로 들어가시면 선호도 투표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푸른숲을 사랑하시는 분들의 투표를 참고하여 연재 순서가 정해지는데요. 블로그에 방문하시는 분들도 잠깐 짬을 내어 의견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카페를 통해 투표해주셔도 되고, 이 곳 덧글로 의견을 남겨 주셔도 됩니다. 의견을 남겨주시는 분들 중 한 분께 특별히 블로그 운영자가 푸른숲 신간을 보내 드릴게요~ 물론 카페 이벤트도 있습니다.^^
푸른숲 직원 연재 주제
편집자, 사랑 좀 해본 편집자의 기획 일지 - 고도비만님
어느 날, 길을 가는데 '도를 아십니까'가 따라 붙었다. 나는 실연 2주차쯤이었다. 짜증이 났다.
세상의 원리가 어쩌고, 도가 어쩌고, 단 한마디로 제압했다. 그들을
"사랑, 해보셨어요?"
"......."
"사랑도 모르고 세상의 원리를 어떻게 알죠, 당신들은?"
... 이제 막 ABC를 뗀 편집자의 연애의 기술 vs 기획의 기술
언제나 봄날 - 사자성어 태교 일기 - 크눌프님
뱃속의 또 하나의 생명 '봄날이'를 건전한 육체와 올바른 정신을 가진 '멀쩡한' 아이로 세상에 내보내기 위한 아내와 남편의 눈물겨운 노력을 그날에 어울리는 사자성어와 함께 엮어내본다.
1컷 만화 - 하이쿠 읊조리는 고양이-미정님
주인공 고양이가 그날에 맞는 자작 하이쿠를 읽어주는 1컷 만화.(단, 작품성이 아주 낮은 하이쿠임)
독거처녀의 살림살이-독거처녀님
"엄마 품 떠난 지 정확히 12년차. 자취 생활 약 6년차.
대출이자 갚는 날짜 돌아오듯 꼬박꼬박 찾아오는 이사철에 맞춰 짐 싸기, 집 구하기의 달인.
소원은 포장이사 + 올수리 새집. 밥 해먹기, 설거지하기, 빨래하기는 괜찮으나 아직 청소하고는 덜 친해진 방년 29세 아가씨."의 좌충우돌 살림살이 꾸리기!
외로워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나를 사로잡은 문장들) - 촉촉한 카스테라님
지하철역, 어느 여름 공원, 카페 한구석, 일식 주점...
외로울 때마다 들렀던 그곳에서 사람 대신 책을 만났다. 현실엔 없는데 책 속엔 참 무궁무진하더라.
나와 똑같은 마음들, 나를 이해하는 사람들, 그리고 나를 사로잡은 문장들...
마치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 꼬맹이님
알고 보면 온통 구라인 사극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실제 역사에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인생 한방!"을 외치며 짚신을 고쳐 신는 <추노>의 대길이 언니.
"고기 없으면 밥 안 먹어!" 떼를 쓰는 <대왕 세종>의 세종대왕.
밀린 돈 받으러 올레길 달려가는 <거상 김만덕>의 만덕이.
그들이 실제 역사 속에서 어떻게 살아갔을지, 픽션 아닌 픽션으로 그들의 하루를 따라가 본다.
20대를 즐겨라. 남자 이야기 - 곰바우님
남자로서 20대에 해야할일
남자가 한참때인 20대에 이런저런 일들을 경험하고 느낄수있는
세상사 이야기, 여태것 혼자인 사람들을위한 조언을 해준다.
디자이너의 여행 그리고 돈 뿔리기! - 엘리님
어릴적 내 꿈은 언제나 화가였고, 죽기 전 꼭 해보고 싶은건 세계여행! 이었다.
중학생 시절 나는 저금통에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 넓은 세상을 보고 지구 온갖 곳에 내 발자국을 남기기 위해...
영어 울렁증이 있던 웹디자이너의 모든것을 다 버리고 떠난 여행기와
나만의 노하우 재태크 방법과 적은 돈으로 이자 불리기! 돈 모으기 등의 나만의 방법을 까발린다.
초보아빠 3살짜리 딸과 놀아주기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서툰 아빠가 말도 잘 통하지 않는 3살짜리 딸과 함께하는 놀이와
에피소드를 이야기한다.
메트로 철학원 - 허당 지선생님
아침에 꼭 빼먹지 않고 보는 운세! 재미로 보는데 가끔 맞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하루를 정리하며 얼마나 맞았는지 적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내 남자들 이야기 -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
나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남친과 푸른숲 마스코트 몽돌군의 사소한 이야기들.
(남친에게 상처받고 몽돌군에게 위로받기 등 ;-;)
사진관집 아들(사진이 있는 북디자인) - 백발소년
책 디자인에서 사진이 어떻게 쓰이고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찬찬이 들여다본다.
작업 경험담 위주로 먼저 가다가 간간이 다른 회사들 책도 들여다 볼 예정.
출판사 직원이 느끼는 맞춤법의 압박 / 허구헛날 가다보니 알게된 서점의 사생활 - 푸근한 냉소
1.출판계의 몸을 담은 후 모든 문서작업시 느껴지는 원인모를 압박....
의 근원을 파헤치는 내맘대로 심리분석 보고서
2. 서점 직원의 성향 , 장단점 , 무료주차 스킬 등등 자유롭게 각 서점들의 재밌는 점,
유익한 이야기 (를 쓰려고 하는데 잘될지는 모르겠음....)
이벤트 참여 : 덧글 남기기, 혹은 카페 들어가기 -> http://cafe.naver.com/prunsoop/76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