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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임혜지의 책에 대한 단상들 :: 2010/03/09 14:12

외국에 살면서 저는 거의 모든 독서를 독일어로 했어요. 그 중에서도 '책 읽어주는 남자' (Der Vorleser, Bernhard Schlink)와 '느림의 발견' (Die Entdeckung der Langsamkeit, Sten Nadolny)이 가장 인상에 남는 책이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은 책이고, 아직도 가끔씩 다시 읽는 책입니다. 앗, 그러고 보니까 둘 다 독일 작가의 책이군요. 요즘은 세월이 좋아졌지만 인터넷을 알기 전에 저는 한글로 된 활자에 굉장히 굶주렸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몇 권 되지 않는 한국책은 내용이 뭐든 간에 거의 달달 외울 정도로 반복해서 읽었지요. 저는 책을 원래 속독을 넘어 폭독에 가까울 정도로 빨리 읽어치우는 성격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론 마음에 드는 책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늘 새로운 감동을 받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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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쓴 첫 책은 독일어로 쓴 전공서적이에요. 두 번째와 세 번째 책을 근년에 한국어로 썼지요. 제가 그동안 써두었던 에세이들 중에서 건축에 관한 내용만 추려서 출판한 것이 재작년에 나온 '내게 말을 거는 공간들(한겨레출판)'입니다. 그러고나서 시사와 일상에 대한 에세이들이 좀 남았길래 제가 출판사에 여쭤봤습니다. 사실 저는 대운하라던가 인권, 성매매 등 시사에 관한 글을 출판하기를 내심 바랬지요. 그런 것이 지금 우리나라에 필요할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푸른숲에서 '일상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모토로 소소한 일상을 통해 세상의 변화를 꿈꾸는 꼭지들을 절묘하게 조합해서 '고등어를 금하노라'로 멋지게 묶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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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저는 소설도 썼답니다. 저의 첫 한국책인 '내게 말을 거는 공간들'을 준비하면서 저의 한국어 실력이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걸 느꼈어요. 그래서 일단 중단하고 '물안개의 집'이라는 소설을 먼저 썼습니다. 내 마음 속에 떠 있는 상을 잡아내어 표현하는 연습으로는 사랑 소설이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런데 뭣도 모르고 뛰어들었다가 아주 혼이 났지 뭡니까? 소설을 쓴다는 작업이 아주 사람 영혼을 말리고 진을 빼더군요. 제가 초보자라서 그랬겠지만 하도 감정이입을 하다보니 소설의 주인공이 임신하니까 저까지 가상임신을 해가지고 이거 실화라고 오해받는가 싶어서 가슴이 덜컥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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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다 쓰고보니 제법 제 마음에 들길래 여기저기 문학상에도 내보고 여러 출판사에 문의했지만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블로그를 만들어서 연재로 솔솔 풀어버렸지요. 많지는 않아도 뜨겁게 공감하는 독자들도 만났고 해서 저는 성공작이라고 자부합니다. 그 소설을 쓰면서 저와 남편 사이의 깊은 상처가 치유된 면도 큰 수확입니다. 초보자로서 글쓴이의 내면세계를 겁없이 드러낸 작품이라 이제는 누가 출판하자고 해도 별로 반갑지 않을 것 같아요.

저는 책이 팔리고 안 팔리고는 우연이라고 믿고 있어요. 독자들이 특정 테마를 바라는 시기에 우연히 그런 책을 내면 잘 팔리는 것이고, 암만 괜찮은 책이라도 독자들이 시기적으로 외면하는 테마라면 안 팔리겠지요. 그런데 글을 쓰는 사람은 지금 당장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쓰는 거거든요. 작가가 독자들의 변화하는 입맛에 다 맞출 수도 없고, 또 그러고 싶어도 그게 안 되니까 글 쓰는 사람들이 가난한 거 아니겠어요? 저는 글 쓰는 그 순간만 저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그 후에 잘 팔리거나 안 팔리는 건 제 덕도 탓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정말 쓰고 싶은 것은 탐정소설이어요. 잔인하지 않으면서 스릴 있는... 고건물에 얽힌 글감도 많이 확보해놓았구요,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까지 미리 써놓았다지요. (앗, 그런데 독일어로 썼구나.) 그런데 언제 그것을 쓰게 될지는 좀 요원합니다. 요즘 제가 거의 의무감에서 숙제처럼 쓰고 있는 글들은 독일 운하에 관한 칼럼 등 시의성이 있는 글들이거든요. 사대강 공사처럼 끔찍한 사건만 막고 나면 저도 한국 일에 신경을 끄고 제가 쓰고 싶은 글을 쓰겠다고 다짐하지만 결국에는 저의 문제지요. 제가 외면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일은 계속 일어날 테니까요. 또 저랑 독일어로 전공서적을 같이 내기로 한 독일 노교수님이 한 분 계신데 제가 아마 그 약속도 거절하지 못할지도 몰라요.

언젠가는 양단간에 결정이 나겠지요. 제가 의무감에서 쓰는 글을 더욱 정성껏 씀으로써 만족감을 느끼던지, 아니면 어느 순간 의무감을 확 던져버리고 탐정소설을 쓰던지...

어쩌면 제가 탐정소설을 쓰더라도 한국어로 쓰게 될지도 몰라요. 제가 독일어로 소설을 쓴다면 꽤 오랜 시간을 모국어와 작별하고 독일어에 몰입해야 할 텐데 제가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을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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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가족과 함께 독일로 이주해 35년을 독일에서 살았다. 칼스루에 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건축사로 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3년 대전 엑스포에서 스위스관 설계 및 기획에 참여했다. 현재 독일 뮌헨에 거주하며 프리랜서로 문화재 실측 조사와 발굴 연구를 하고 있고, 일감이 없을 때는 글을 쓰고 살림을 하느라 허둥댄다. 성격은 극과 극이지만 이상(理想)이 맞는 독일 남자와 결혼해 20년 넘게 같이 살고 있다. ‘우리 아이가 공부는 못해도 성격은 좋으니 걱정 마세요’라며 선생님을 위로하고 딸에게 대놓고 콘돔 사용법을 가르치는 대범한 엄마이지만, 댄스 학원에서 남편과 왈츠를 출 때가 가장 행복한 만년 소녀이기도 하다. 지은 책으로 《프리드리히 바인브렌너 시대의 칼스루에 주택》(독일어), 《내게 말을 거는 공간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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