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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독서 취향을 따라간다는 것은② - 나를 사로잡은 문장들 :: 2010/08/26 17:08

 한 달 하고도 보름이 지나도록 나는 그 사람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가 마음을 터놓는 것으로 보이는 선배와 친구 관계를 파악한 뒤, 심지어 그들에게까지 인정받기 위해 안달했던 것 같다(피곤한 성격이다. 지금의 될 대로 되라, 식의 성격은 당시에 대한 반작용일지도 모른다). 정작 그 사람이 나에 대해 어느 정도 호감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동기인 선배가 지나가듯 흘린 “근데 P는 꼭 네가 잘 있는지 묻더라. 너희 둘이 친했나?”라는 한 마디로 한 달은 거뜬히 견딜 수 있었다.
 나중에 그 선배는 고백했다, 내 표정만 봐도 절절한 감정이 다 드러나서 용기를 주지 않고는 못 배기겠더라고, 하지만 자신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고.
 그런데 나는 그의 어떤 점에 그토록 매료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 모습, 곁에 있는 다른 사람을 보이지 않게 배려하는, 남자들에겐 보기 드문 성품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는 겸손했다.
“그는 얼마나 겸손한가? 그는 모든 것을 미안해했다. 자리에 있는 것, 말하는 것, 조용히 있는 것, 생각하는 것, 눈부시게 떠오르는 생각들을 표현하는 것, 심지어는 비길 데 없는 칭찬을 아낌없이 베푸는 것에 대해서도.” _알랭 드 보통,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그리고 삼 주가 더 지났을 무렵, 나는 작은 사실을 하나 알게 된다. 그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내가 참고서처럼 읽고 있던 <에티카>는 그 여자가 활동하던 철학 동아리에 그가 갓 가입해서 읽게 된 첫 책이라는 것. 그의 취향과는 무관한, 그가 그녀에게 가기 위한 책. 나는 그것을 읽고 있었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냥 내팽개쳐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실은 나의 순진무구한 전략이 우스워지는 게 싫어서 오기로 두 달을 더 그 책을 붙잡고 있었다. 내가 그 책을 순수한 동기로 읽게 된 것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하지만 그 책을 손에서 떠나보낼 즈음에 나는 큰 사실을 또 하나 알게 된다. 그가 호감을 가졌던 그녀에겐 오래된 남자친구가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연모하는 이들이 두엇 있었다는 것. 그는 그중 하나라는 것. 나의 마음을 아는 선배는 ‘곁에서 지켜보다가 그가 힘들어할 때 의지할 수 있는 여자가 되는’ 전략을 실행해보라 했다. 나는 피곤하다 했다. 사실 스피노자 선생과 함께한 오랜 시간 끝에 내 마음은 피곤에 전 지 오래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의 연애는 부정적인 결말을 맞았고, 그는 꽤나 힘들어하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불쑥 일본으로 교환학생을 떠난다고 했다. 나는 아무런 사심 없이, 실은 마지막으로 칼을 뽑았으니 무라도 자른다는 심정으로 그에게 책 한 권을 선물했다. 내가 가장 즐겨 읽던 쿤데라의 책이었다(그때 그의 자취방에서 꽂혀 있던 책 중에서 나의 취향과 일치했던 단 한 권의 책이 그것이었다는 건 맹세코 기억하지 못한 채였다). 나중에 교토에서 도착한 그의 엽서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우리 둘, 책 읽는 취향이 비슷한 것 같아. 계속 편지해도 될까?”
 드디어!

 무솔리니에 대한 열정을 자아의 일부로 만드는 이는 정치 투사가 되고, 고양이를, 음악을, 혹은 고가구를 찬양하는 이는 친구들에게 그것을 선물한다.
 슈만을 좋아하고 슈베르트를 싫어하는 친구가 있다고 하자. 그와는 달리 당신은 슈베르트를 미치도록 좋아하고 슈만이라면 진저리를 친다. 당신이라면 친구에게 생일 선물로 누구의 음반을 줄 것인가? 그가 좋아하는 슈만의 음반인가, 아니면 당신이 좋아하는 슈베르트의 음반인가? (...) 어쨌거나 당신이 어떤 선물을 한다면 그것은 애정 때문이요, 당신 자신의 일부를, 당신 마음의 한 조각을 주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_밀란 쿤데라, <불멸>

그땐 몰랐다. 진짜 계속 편지만 하게 될 줄은…….


글. 촉촉한 카스테라

2010/08/26 17:08 2010/08/26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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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띠보 | 2010/08/27 09:22 | PERMALINK | EDIT/DEL | REPLY

    옴마야. 복잡다단한 관계망을 쭉 따라가다보니
    괜시리 숨소리가 잔잔해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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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독서 취향을 따라간다는 것은① - 나를 사로잡은 문장들 :: 2010/08/04 16:48

#4. 누군가의 독서 취향을 따라간다는 것은①

 “오늘은 어떤 작가 선생님을 만났는데 말이지.”
 고 군 앞에서 그날의 일과를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게 습관이 되어버린 어느 날, 그가 돌아갔다. 그러니까 더 이상 따뜻한 물을 받아놓고 내 넋두리를 들어주거나, 함께 맥주를 기울이며 고민 상담을 해줄 사람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지난 금요일 밤이었다. 여느 때처럼 대야에 발을 담그고 고 군에게 이런저런 책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었다. 책 이야기라고는 했지만, 실은 나의 이야기였다. 그 책을 읽던 중에 생긴, 나로 하여금 밤잠을 이루지 못하게 만든 어떤 일들을 마치 정신과 소파에 누워 상담이라도 받듯 줄줄이 쏟아냈다. 그리고 결국은 아주 오랫동안 나를 붙들고 있었던 한 가지 문제로 돌아간다.

맨 처음 누군가에게 매혹되는 순간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법이다. 그 자리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은 희미해지고, 그의 인상만이 불도장처럼 마음에 찍힌다. 농담, 수줍은 미소, 그리고 가끔씩 터져 나오는 핵심을 찌르는 말들……세상에. 그가 다른 사람과 나누고 있던 대화까지도 기억이 나면 이미 위험한 지경이다. 하지만 믿을 수 없다. 첫인상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넌 사람을 볼 줄 모르잖아. 상처받기 싫어하는 내 마음속에서 어떤 소리가 들린다. 지금 네가 보고 있는 저것은 껍데기야. 맞아. 하지만 가끔은 그 껍데기에도 사로잡혀.

그러나 내가 그녀의 얼굴과 태도, 그녀의 몸매, 뭐라 말할 수 없는 향기를 평가하기 전에도, 사실 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난 것이기는 하지만, 나는 내가 그녀의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나는 발견했다. 그녀가 정말로 말을 할 줄 안다는 것. 처음에는 그녀가 지나치게 반듯하다고 생각했지만, 곧 그녀는 단지 언어를 집행하고 있을 뿐임을 깨달았다. 그녀는 한 단어씩 나아갔다. 모든 글자에는 경계가 있었다. 나는 그녀의 크고 풍만한 입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입은 어두운 집을 돌아다니며 불을 켤 수 있는 사람들처럼 자신의 문장들 속을 휩쓸고 다녔다. 어떤 엄격함을 갖춘 관능. _이창래, <영원한 이방인>


 껍데기란 누구나 볼 수 있는걸, 너만 알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의미가 없어. 첫 만남에서 마음이 혼란스러워질 때면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내다 보면 유감스럽게도 다시,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모임이 파한 후 술에 취한 후배 때문에 뜻하지 않게 들른 그의 집에서. “괜찮다면 네가 있는 편이 좋겠다. 나중에 오해받을 상황을 만들긴 싫어서…….” 그의 난감한 얼굴에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선배들이 술을 사러 나가고, 그는 주섬주섬 집 안에 널린 물건들을 치운다.

 아, 이러면 정말 나도 어쩔 수 없다고. 나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내 마음을 보이지 않고 그 사람을 엿볼 수 있는 기회. 그의 책장이 있다. 전공 서적, 철학책들, 귀퉁이가 접힌 시집들. 그리고 바로 어젯밤에 읽은 듯 펜이 끼워진 채 이불 옆에 놓인 한 권의 책. 나는 무심한 표정으로 책을 들춰 펜이 끼워진 곳을 읽는다.
 “한 개인의 본질이 또 다른 개인의 본질과 다른 만큼, 한 개인의 모든 감정들은 또 다른 개인의 감정들과 다르다.” _<에티카>

 머릿속에 책의 제목을 넣어두고 방 안을 둘러본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 중에 내가 읽은 책과 일치하는 게 있는지 살펴본다. 한 권, 두 권, 세 권, 네 권……. 갈 길이 멀다. 그러나 그중 한 권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책이다. 책장 옆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음반들의 이름도 외워둔다.
 다음 날 나는 책과 시디 두 장을 주문했다. 그러나 책은 너무 어려워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이래서야 그와 대화를 할 수 있겠어? 매일 밤 숙제를 하듯 <에티카>를 읽고, 어느 책에서 본 대로 그 사람에 관한 리스트를 적어나갔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갔다.

당신은 숨기는 게 많아
인생에서는 B+짜리 학생
무엇보다 먼저 바그너와 스트라우스를 흥얼거리는 사람
불법 외인
정서적 외인
장르광
감상주의자
낯선 사람(…)

_이창래, <영원한 이방인>

2010/08/04 16:48 2010/08/04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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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정리하는 어떤 방법에 관하여 - 나를 사로잡은 문장들 #3 :: 2010/07/14 17:23

#3. 감정을 정리하는 어떤 방법에 관하여

“고 군! 나 왔어. 이것 봐, 인터넷으로 주문한 캣타워가 도착했어…….”
 “고 군……?”
 베란다로 난 창문으로 고 군의 뒷모습이 보였다. 축 쳐진 어깨도.
 “아 주인님. 오셨군요…….”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아뇨. 그냥 기분이 좀 울적해서요.”
 “음. 그렇구나. 나도 오늘 좀 그랬는데. 우리 요 앞에 가서 한잔할까?”
 싫다는 고 군을 끌고 집 앞 주점으로 들어갔다. 맥주와 고 군이 좋아하는 감자고로케를 시켜놓고 나는 주절주절 하루의 일과를 털어놓았다. 고 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내 말을 듣고 있었다.
 “고 군. 근데 정말 아무 일 없었어?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지만…….”
 “주인님, 실은 아까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가 예전에 사귀었던 친구를 만났어요.”
 “아, 그때 말했던 편사고의 단짝? 헤어질 때 많이 힘들었다고 했던가, 그 친구가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여서?”
 “네. 그런데 서로 안부 인사를 주고받은 후에 그 친구가 그러더라구요…….”
고 군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었다.
 “미안하다고.”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고 군이 물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나직이 말했다.
 “미안해. 지금까지 너를 놔주지 않았던 거…….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으면서도, 나를 잊지 못하는 네게 계속 의지한 거……. 우리 헤어지자고 한 뒤에도 넌 한결같이 나를 믿어주고 내가 부르면 달려오고 내 편이 되어주었잖아.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네가 계속 그렇게 내 곁에 있길,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어. 내 말이 얼마나 이기적으로 들리는지 알아. 정말 미안해. 이제 나에 대한 미련을 버려도 돼.”
 “왜 지금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렇게 날 힘들게 해놓고?”
 “고 군, 정말 미안해. 왜냐하면 이제야 알았기 때문이야. 내가 너와 같은 상황에 놓인 지금에야 네가 얼마나 힘들어했을지 알게 되었거든. 그러니까 이제 미련을 버리고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그 말을 듣고 나서 제가 바보가 된 기분이었어요. 사실 얼마 전까지도 그녀는 힘들 때면 저를 불러냈어요. 헤어졌지만 그렇게라도 인연이 유지되는 것에 대해 저는 일말의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나 봐요. 그러니까 그녀가 표현하지 않았을 뿐 저에 대한 마음이 남아 있을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바보처럼…….”
 그날 밤 우리는 새벽까지 맥주를 마셨다. 나는 그냥 고 군의 얘기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고 군은 그렇게 좋아하는 고로케는 손도 대지 않고 그냥 맥주만 마셨다. 혹시나 해서 생선까스를 하나 더 주문했지만 역시나 먹지 않았다.
 내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고 군은 연신 “주인님, 죄송해요. 제가 참 바보 같죠” 하고 중얼거렸다.
 그날 밤 나는 잠이 오지 않아 뒤척거리다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편지를 써서 고양이 수첩에 넣어두었다.

“고 군. 우리는 모두 외로운 바보들이야. 그런 바보들의 외로움을 온전히 지켜봐줄 수 있는 건 신뿐이야. 그리고 우리는 종종 책속에서 그런 신을 만나.
 고 군처럼 내가 몇 년간 한 사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을 때 내 감정을 정리하게 해준 책의 한 부분을 적었어. 고 군에게도 도움이 되길. 그리고 내일은 우리 고로케도 먹자.”  

 “어째서 당신만 언덕을 내려가는 거지? 불에 타 죽을 셈인가?”
 “죽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서쪽엔 당신의 집이 있잖아요. 그래서 난 동쪽으로 가요.”
 화염 가득한 내 시야에 까만 한 점으로 남은 그녀의 모습을, 내 눈을 찌르는 통증처럼 느끼면 나는 잠을 깼다.
 눈꼬리에 눈물이 흘렀다.

 내 집이 있는 방향을 향해 걷는 것조차 싫다는 그녀의 말을 이미 난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없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성에 채찍질하여, 나에 대한 그녀의 감정이 싸늘히 식어버렸다고 겉으로는 체념하고 있었다 해도, 그녀의 감정 어딘가에 나를 위한 한 방울이 있으려니 하면서 실제의 그녀와는 무관하게 오직 나 자신 제멋대로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한 자신을 호되게 냉소하면서도 은밀히 담아두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런 꿈을 꾼 걸 보면, 그녀의 마음이 눈곱만치도 내게 없다고 나 자신의 마음 구석구석까지 굳게 믿어버리고 만 것일까.
 꿈은 나의 감정이다. 꿈속 그녀의 감정은, 내가 지어낸 그녀의 감정이다. 나의 감정이다. 게다가 꿈에는 감정의 허세나 허영이 없잖은가.
 이런 생각에, 나는 쓸쓸했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 《손바닥 소설》 중 〈불을 향해 가는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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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테라님의 <외로워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 나를 사로잡은 문장들>
교정보는 고양이를 만나다
고양이 수첩
감정을 정리하는 어떤 방법에 관하여

2010/07/14 17:23 2010/07/14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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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수첩 - 나를 사로잡은 문장들 #2 :: 2010/06/25 11:12

#2. 고양이 수첩

사용자 삽입 이미지


 “뭘 보고 있는 거야? 눈은 충혈돼 가지고…….”
 고 군이 쑥스러운 듯 교정지 아래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오드리 헵번? 고양이도 이런 걸 좋아한달 말야?”
 “예전 주인님이 밤마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보셨거든요…….”
 “창가에서 기타 치며 <문 리버> 부르던 헵번은 정말 근사했지? 근데 전 주인은 어떤 사람?”
 “아주 활발한 남자 분이었어요. 새로운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고, 한번 책 얘기를 시작하시면 끝날 줄을 몰랐죠.”
 “흠, 고 군은 나 말고도 주인이 여럿 있었지, 난 고양이라곤 고 군이 처음인데 말야. 왠지 기분이…….”
 “하지만 지금 저의 주인님은 카스테라 님이니까요. 그렇게 서운해하실 건…….”
 그렇게 말하는 고 군의 입 주위가 살짝 씰룩거렸다. 왠지 좋아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데 말야, 오늘은 고 군이 좋아하는 책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어때?”
 “하지만 제가 여기 온 건,”
 “그러니까 내가 회복되기 위해선 고 군의 이야기가 필요하다구.”
 나는 음흉하게 씨익 웃었다.
 “아, 그러시다면 잠시만요.”
 고 군이 테이블 옆의 보자기에서 수첩을 하나 꺼냈다.
 “제가 좋아하는 문장을 적어놓은 수첩입지요.”
 고 군의 얼굴에 자랑스러운 표정이 퍼져나갔다.
 “흠흠. 제가 읽어드리는 구절이 어느 책에서 나온 건지 알아맞히시면 계속 읽어드릴게요. 틀릴 경우 주인님 차례가 되는 거구요.”
 “그래, 읽어봐.”
 “신기해요. 어떤 음악을 들으면, 그 곳을 제게 처음 알려준 사람이 생각나요. 그것도 번번이요. 처음 가본 길, 처음 읽은 책도 마찬가지고요. 세상에 그런 게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떠올라요. '이름을 알려준 사람의 이름'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건 사물에 영원히 달라붙어버리는 것 같아요.”
 “김애란, <너의 여름은 어떠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고.”
 “앗, 역시 주인님. 이번엔 좀 어려운 걸로.”
 “훗, 해보시지.”
 “이 거리는 아샤 라시스 거리라 불린다. 엔지니어인 그녀가 저자 속에 그 길을 놓았다.”
 “…….”
 “모르시겠어요?”
 “응…….”
 “발터 벤야민의 <일방통행로>에 나오는 구절이랍니다. 벤야민은 친구의 연인인 아샤를 흠모해서 이런 헌사를 바쳤어요. 정말 낭만적이지요?”

 ‘이런 유식한 고양이 같으니라고.’
 “좋아, 그럼 내 차례군. 난 고 군처럼 수첩이 없어서 정확히는 기억을 못 하는데, 정말 가슴이 저릿했던 한 문장이 있어. 두 명의 친구가 오랜만에 만났어. 기억이 안 나니 A와 B라고 할게. 아마 A의 직장으로 고향 친구인 B가 찾아와 오랜만에 재회한 상황이었던 것 같아. 둘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고, A는 바빠 죽겠는데 이야기를 마친 B가 화장실에서 이를 닦는다고 하더니 아주 오래오래 칫솔질을 하는 거야. 잇몸 다 닳겠다, 짜증이 솟구친 A가 한마디 하자, B가 이렇게 대답해. '내가 이를 다 닦으면 너 갈 거잖아.' 그때 그 한 구절이 정말 어찌나 가슴에 콕 박히던지. 나도 그런 적이 있었거든. 대학 때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난 좀 외톨이였던 반면 그 친구는 인기도 많고 온갖 동아리 활동을 하며 대학생활을 즐기던 중이었지. 그 애가 한번 시간을 내서 만나면 나는 헤어질 시간을 늦추고 싶어서 괜히 무슨 할 말이 있는 양 우물쭈물하곤 했어. 자존심 때문에 나랑 더 있어달라곤 차마 말 못 하고 그냥 오래오래 시간을 끄는 거지. 느릿느릿 안녕을 고하려고.”
 “네, 저도 읽은 기억이 나요. 단편소설이었는데 신경숙 작가인가.”
 “딩동댕. 맞힌 걸로 할게. 사실 나도 소설 제목은 기억이 안 나거든. 고 군은 다독가구나.”
 “호홋, 뭘요. 그럼 주인님, 하나 더 부탁드려요.”
 “음. 그러고 보니 나도 최근에 다이어리에 적어놓은 구절이 있어. 잠시만…… 여기 있다.  ‘매그니토가 사악한 존재가 된 것은 오랫동안 슬픔과 증오에 휩싸여 살았던 결과입니다. (...) 그의 증오와 슬픔은 처음에는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들에 영향을 미치는 '우리의 외부' 대상들이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중요한 건 결국 그 감정들이 우리의 '내면에 일으킨 결과입니다.’”
 “전혀 모르겠는데요. 철학책인 것 같은데…….”
 “응. 내가 최근에 교정보다가 적어놓은 거야. 내게 더할 수 없는 위안을 준 동시에 오랜 친구 하나를 잃게 한 구절이지…….”

 “이런 곳에 들어오려던 게 아니었어.”
 돌잔치로 주위가 떠들썩한 어느 레스토랑에서 그렇게 말하며 난색을 표하던 그 애의 얼굴이 기억난다. 난 뭐 별로 상관없어. 조용한 편보다는 그 편이 덜 어색하잖아.
 어쨌든 나는 타이밍을 맞추는 데는 쥐약이었다. 어쩌면 좋은 타이밍을 망치는 데 소질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고 상대와 나와의 간극을 메우기보다는, 직구를 던지고 게임을 끝내버리는 일방적인 사람에 가까웠던 것 같다. 나를 잘 아는 사람들조차 이런 내 모습에 종종 놀랄 정도로.
 그러면서도 한 가지 믿고 있는 표지 같은 게 있었다. 그즈음 나를 사로잡고 있는 어떤 것(어떤 문장, 어떤 음악, 어떤 장소……)에 반응하는 상대의 모습을 보며 조심스레 나와 맞는 사람인지 점쳐보는 습관. 그날 그 자리에서도 어김없이 내가 편집하던 철학책의 한 단락이  불쑥 튀어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이건 좋지 않아. 마음속에서 그런 소리가 들렸지만 늦었다.
 “나 최근에 참 못나게 살았다. 그러니까 상황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내 앞에 혹은 주위에  기쁜 일이 생겨도 기뻐하지 못하고, 조금만 기대하지 않은 일이 생겨도 확 방어막을 쳐버려. 최근에 이런 글을 읽었어. 어떤 사람의 증오와 슬픔이 처음엔 아무리 정당했다 하더라도……중요한 건 결국 그 감정들이 우리 ‘내면에 일으킨’ 결과라는 것.’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마음고생을 하던 때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까지는 내게 닥친 일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 발버둥을 치다가, 마지막 한 방이 왔을 때는 그러기도 싫을 정도가 되었다. 팔짱을 끼고 매섭게 세상을 노려보다가, 나동그라져 이내 손을 놓아버렸다. 내가 믿는 신에게 손 내밀 힘조차 없었다, 아니, 그러기 싫었다. 나를 사로잡은 감정은 점차 대상을 알 수 없는 분노로 변해서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날을 세웠다. 삼십 넘어 이 무슨 사춘기인가.
 그런데 순전히 일로 만난 철학책 속의 한 구절이 가슴을 세차게 때렸다. 나의 슬픔이 아무리 정당한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 중요한 건 슬픔이 내 안에 들어와 일으킨 결과다. 그 문장이 바닥까지 내려갔던 나를 구원해주었던 것 같다.
 처음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야. 지금 그 슬픔이 너를 어떤 상태로 끌고 가고 있는지 눈을 똑바로 뜨고 봐야 해. 그런 일이 일어난 이유에 집착하는 건 멍청한 짓이야. 슬픔에게 먹히기 전에 빠져나와! 죽을 것 같아도……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교정을 보는데 눈앞이 흐려졌다.

 떠들썩한 소음을 뒤로하고, 오랜 친구가 더는 친구가 아니었던 그날, 나는 작은 목소리로 나를 이해해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전달되지 않았다.
 내가 전하려던 건 그게 아니었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 아이의 피로한 눈에서 나의 말이 그저 튕겨나가고 있는 것을 보며 나는 입을 다물었다.
 최악의 타이밍. 책에서 받은 위로는 책에서 끝내는 편이 좋다. 이해받지 못한, 공유되지 못한 소중한 감정은 이내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고 만다.
 우리는 서로의 힘든 상황을 알았다. 십오 년 동안 우리가 겪은 일들, 보이기 싫은 구석들을 보이고 이해하는 데 길들여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서로의 스무 살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착하고 순수하고 상대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아이, 장난기 많고 순정만화를 좋아하고 자신감이 충만한 아이. 하지만 이제 더는 그렇지 않다는 걸 서로 알았다. 머리가 굵어졌고, 세상을 보는 시선도, 살아가는 방식도 달라졌다. 
 그 레스토랑 앞을 지날 때마다 되묻곤 했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도 순전한 눈빛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저 들어주었다면 달라졌을까?

 “주인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어, 뭐라고?”
 “무슨 책인지 모르겠어요. 제목을 알려주세요. 궁금해서…….”
 “아, 그래. '스튜디오 필로, 철학이 젊음에 답하다'라는 책이야. 난 철학책이 머리가 아닌 내 삶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

 “아, 네. 적어두겠습니다.”
 고 군은 고양이 수첩에 연필로 꾹꾹 눌러 책 제목을 적었다.
 고 군,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카스테라님의 <외로워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 나를 사로잡은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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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수첩
감정을 정리하는 어떤 방법에 관하여

2010/06/25 11:12 2010/06/25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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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도비만 | 2010/06/25 16:32 | PERMALINK | EDIT/DEL | REPLY

    제가 일방통행로에서 꽂혔던 말은,

    이별을 고하는 사람이 [이별을 전해 듣는 사람보다]
    얼마나 더 쉽게 사랑받는가!
    멀어져 가는 자에 대해 [감정의] 불꽃이 보다 순수하게 타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벤야민에게서 이런 말만을 기억하는 건가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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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보는 고양이를 만나다 - 나를 사로잡은 문장들 #1 :: 2010/06/18 11:48

#1. 교정보는 고양이를 만나다

 “주인님, 많이 피곤하신 모양입니다. 펜을 내려놓고 이제 잠자리에 드시지요.”
 “아, 안 돼……내일까지 교정을 다 봐야 하는데, 음냐.”
 고 군이 우리 집에 나타난 것은 삼 주 전이었다. 빨간색 펜을 꼭 붙들고 침대 위에서 침을 흘리며 자던 나는 사각사각 글씨 소리에 부스스 잠을 깼다.
 내 책상 앞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팔 토시까지 끼고 반듯한 자세로 앉아 교정을 보고 있는 늘씬한 뒷모습. 그런데 의자 뒤편으로 무언가가 비죽이 나와 있다. 저것은…… 꼬리? 순간 그가 고개를 돌렸다. 헉, 고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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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셨습니까, 주인님?”
 주인님? 그는 안경을 벗고 팔 토시까지 벗어 책상 위에 올려놓더니 공손히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주인님의 부름을 받고 이곳에 찾아왔습니다.”
 “나 부른 적 없는데…….”
 “부르셨습니다. 그것도 서른세 번이나요. 교정지에 흘린 침에 펜글씨가 번져서 에메랄드빛을 띠게 되면 저희 편사고(편집자를 사랑하는 고양이 모임)로 신호가 옵니다. 피곤에 지쳐 책에 대한 사랑이 식어버린 편집자를 회복시키는 것이 저희의 모토입니다.”
 “그러니까 날 위해 뭔가를 해주는 거예요?”
 “네. 먼저 주인님의 어린 시절 외로움을 달래주었던 책들을 찾아 여행을 떠날 겁니다. 저는 스캣포드에서 독서치료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블라블라블라).”

 “잠깐만!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데, 난 바쁘다구요! 이번 주까지 봐야 할 교정지도 있고.”
 “그건, 염려 마세요. 저로 말할 것 같으면 '교정보는 고양이' 2등상을 수상한 전력이 있지요. 그러니 일 걱정은 하지 마시고, 저만 믿고 따라오시면 됩니다. 주인님에게 따뜻한 기억을 심어주었던 책들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니, 생각만 해도 신나지 않으세요?”
 고양이의 눈에 별이 한가득 채워졌다.
 “자, 먼저 여기 족욕을 위한 물을 떠다놓았으니 발을 담그세요.”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 앞에 놓인 대야에 발을 넣었다. 뭐, 꿈이라고 해도 별로 나쁘지 않은데…….
 “아 뭐라고 부르면 되죠, 고양이... 군?”
 “고 군이라고 불러주세요, 심플하게. 앞으로 더 이상 외롭게 잠드시는 일은 없을 거예요.”
 고 군은 은색 수염을 매만지며 결연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대야 속 따뜻한 물의 온기가 발을 통해 몸 전체에 퍼지자 나는 최면에 걸린 듯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주인님, 눈을 뜨세요.”
 고 군의 속삭임에 나는 눈을 떴다.
 앗, 여기는 나의 중학교 시절 도서실. 국어부장이라는 이유로 도서실 열쇠를 맡아서, 점심시간마다 숨어들던 곳이다. 헤르만 헤세, 루이제 린저 등의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는 먼지 쌓인 서가에서 보내는 나만의 시간은 정말 충만했다. 사교적인 성격이 못 되던 나는 거기서 책을 읽고, 과제를 하고, 편지를 쓰고, 로맨스소설 따위를 끼적였다. 물론 나는 왜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친해지지 못할까, 고민도 수없이 하면서.(잠시 내성적인 사람들의 변을 해보자면, 이들에겐 자신만의 세계가 너무 크다, 한마디로 자의식이 넘친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대한 관심도 지대하다, 한마디로 다른 사람도 엄청 의식한다. 그러다 보면 나의 세계와 그들의 세계를 이해하는 사이 그만 쉬이 지쳐버리고 만다. 서로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진행되어야 할 순간에, 지금 나의 상태와 감정과 생각과, 그쪽의 상태와 감정과 생각을 헤아리다가 그만 패닉에 빠진다. 그리고 아, 이런 소모적인 건 싫어, 이러느니 혼자 있을래, 라는 선언과 함께 시작되는 외로움의 악순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성적인 사람들의 수줍음을 사랑한다. 그들은 쉽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단정하지 않고,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대신 자기에게 돌아가 그 순간의 자신이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었는지를 찬찬히 돌아본다. 서툴지만 예쁜 사람들…….)

 암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던 내게 책은 어떤 말을 걸었던가?
 아아. 그냥 조용히 내가 읽어주길 기다리며 자신의 몸을 내보이던 그 사랑스러운 속살을 기억한다. 강요하지 않는다. 그냥 한 자 한 자를 안고 내 앞에 있을 뿐이다. 첫사랑은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다. 역시 도서실에서 단짝 친구와 수학 정석을 앞에 둔 채 흥분한 목소리로 외치던 내 모습이 생생히 기억난다.
 “나의 마에카와 다다시를 찾았어!”
 ‘마에카와 다다시’는 《길은 여기에》(《빙점》의 작가인 미우라 아야코의 자전 에세이)에 등장하는 저자의 소꼽친구 이름이었다. 초등학교 교사로서 일본의 가치들을 아이들에게 열정적으로 전달하며 살던 저자 아야코가, 패전을 맞으면서 자신이 믿던 모든 것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경험을 하고, 폐결핵에 걸려 요양 생활을 하던 13년의 기억을 담은 책이다. 허무주의에 빠져 자신을 방치한 채 남성들과 문란한 관계를 갖기도 하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던 그녀에게 초등학교 동창인 마에카와 다다시가 찾아온다. 이성으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역시 같은 병을 앓고 있던 그는 자신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저자와 연인 관계를 꿈꾸지 않는다), 저자가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길'을 발견하길 원했던 그의 진심이 엿보이는 편지 한 구절에 나는 보라색 볼펜으로 밑줄을 그어놓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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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지하게 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을 보는 건 참으로 쓸쓸한 일이지요.
그것이 설사 아야짱이 아니더라도 쓸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뭐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저자는 일관되게 신을 조롱하고 늘 죽음을 꿈꾸지만, 어느 날 춘광대에서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며 자기 발을 돌로 내려치는 그의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아야짱, 그렇게 살다간 당신은 죽고 말아.”
 저자는 멍해져서 땅 밑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열심히 어딘가를 향해 먹이를 나르는 개미를 본다. 그리고 발견한다.
 ‘이 개미에겐 목적이 있다.’
 문득 마음이 쓸쓸해졌지만, 그녀의 가슴속에는 조용한 의지가 샘솟는다.
 ‘속았다 생각하고 이 사람이 사는 방식을 따라가 볼까?’
 춘광대의 그 장면으로 인해 저자가 어떤 빛을 발견했듯이 나 역시 그러했다. 대학에 떨어진 후 안 그래도 내성적이었던 나는 더욱더 사람을 사귀는 것에 두려움을 갖게 되었지만, 이 책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어떤 끈을 보게 되었다. 이후 “배우고 싶다고 생각하는 소녀와 가르치고 싶다고 생각하는 청년의 만남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는 릴케의 말을 연애의 신조로 생각했으며, 종교를 가지게 되었다. 그때 내가 동경하던 현실의 마에카와 다다시는 선교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나에게 빛을 보여줄 책들을 찾아다니며 이렇게 편집자로 살고 있다.

 “주인님의 마에카와 다다시는 그 후로 만나보셨나요?”
 고 군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분은 벌써 결혼을 하셨지. 근데 고 군은 중매도 하나봐?"
 "아, 주인님의 외로움을 달래드릴 방법을 찾는 게 저의 역할이니까요. 심신의 회복을 위해서는…….”
 “아, 고 군. 심신의 회복도 좋은데 어제 그 교정 끝내놓았어?”
 “네네. 다 끝나갑니다~”
 고 군은 팔 토시를 끼더니 의자 위로 올라앉았다.


카스테라님의 <외로워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 나를 사로잡은 문장들>
교정보는 고양이를 만나다
고양이 수첩
감정을 정리하는 어떤 방법에 관하여

2010/06/18 11:48 2010/06/18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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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눌프 | 2010/06/22 09:37 | PERMALINK | EDIT/DEL | REPLY

    그렇게 고양이를 키우고 싶어 하시더니만, 그 이유가... ㅋ

  • 토트 | 2010/06/22 09:51 | PERMALINK | EDIT/DEL | REPLY

    갑자기 회사에 몽돌이와 고양이를 같이 키우고 싶은 생각이...^^
    고양이 삽화는 이재현 팀장님의 작품이에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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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사건을 받아들이는 방법 - 아지즈 네신을 만나다 :: 2009/03/19 15:30


당신을 찌푸리게 만드는 우울한 사건 사고를
‘무심한 듯 시크하게’ 받아들이는 방법


1. 소녀시대의 <Gee>를 무한 리피트한다
2. <아내의 유혹>을 시청한다
3. <꽃.남>의 F4와 사랑에 빠진다
4. 아지즈 네신을 읽는다


터키의 국민 작가 아지즈 네신.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오르한 파묵은 그에 대해 “현대 터키 문학에 유례없이 광범위한 영향을 끼친 작가다. 그의 작품들은 포복절도할 웃음과 다채로운 이야깃거리로 성대한 만찬을 연상케 한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터키의 황석영’, ‘터키의 로베르토 베니니’라고 불리는 풍자 소설의 대가 아지즈 네신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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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 아지즈 네신 씨, 안녕하세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오르한 파묵이 당신을 극찬한 기사를 봤습니다. 터키인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국민 작가로 당신을 꼽는다고 하던데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당신을 ‘터키의 황석영’이라고 말하는 독자들도 있던데요.

아지즈 네신(이하 네신): 제가 황석영 작가와 비교되는 것은 아마 수감생활과 유배생활을 반복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터키 계엄령 하에서 정부가 언론인들을 검열하고 탄압하는 일들이 빈번히 일어났어요. 저는 그런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자주 썼고, 네티즌 여러분이 여러 개의 아이디로 자신을 숨기듯 저 역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200개나 되는 필명을 쓰기도 했답니다. 그러다가 내란선동 및 좌익활동이란 죄목으로 재판을 받은 횟수만도 250회에 이르지요. 유배생활을 제외하고 5년 6개월간 수감생활을 했습니다.

Q2. 담담하게 이야기하시지만 유배생활은 정말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 출간된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는 자전 소설이라고 들었는데요.

네신 : 네, 저는 당시에 <마르코파샤>라는 풍자잡지에 글을 기고하고 있었는데, 그런 제가 정부의 눈엣가시였나 봅니다.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팸플릿을 만들다가 인쇄소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황당한 게, 인쇄가 끝나기도 전에 경찰이 들이닥친 거라 그걸 읽은 사람이 없었지요. 안 읽었다고 하는 인쇄소 직원들을 심문해서 ‘불온 문서 유포죄’라는 죄목을 붙이더군요. 그러다 결국 유배지로 가게 되었지요. 거기서 소심하고 비굴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많이 겪었지요. 그때 겪은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은 책에 담겨 있습니다. 어쨌든 저보다 더 힘든 유배생활을 겪은 사람들 편에서 보면 제가 유배지에서 겪은 일들은 관광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Q3, 그렇군요, 우배지에서의 경험을 읽으면서 60년 전 터키의 모습이 꼭 우리나라의 모습과 흡사하다는 생각에 찐한 페이소스를 느꼈습니다. 요즘 한국은 공무원들이 억대의 공금을 횡령한 사건으로 어수선합니다. 작품 중에 관공서에 반드시 비치해두어야 하는 공무원 필독 도서가 있다고 하는데요? 

네신: 아, 《생사불명 야샤르》 말씀이시군요. 공무원들의 행태는 세계적으로 비슷한가 봅니다.(웃음) 주인공 야샤르는 열두 살 때 초등학교 입학 서류를 준비하러 동사무소에 갔다가 그곳에서 자신이 ‘공식적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주민등록증이 없었던 거죠. 주인공은 혼인 신고도 못하고 아들을 호적에 올리지도 못하고 늘상 불이익을 받으며 죽은 것처럼 사는데, 군복무나 세금 문제 등 정부가 필요한 순간에는 시시때때로 살아나는 거예요. 이런 관료주의의 횡포나 부조리한 세상의 우스꽝스러운 풍경들을 보여줌으로써 우리 인간들이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았으면 했습니다.

Q4, 언젠가 "터키인의 60퍼센트는 바보다."라는 말을 해서 터키를 발칵 뒤집은 적이 있습니다. 비난 여론이 들끓었을 때, 당신은 "사실 그때 터키 국민의 92퍼센트가 바보라고 말하려 했습니다."라는 인상적인 말을 남겼지요. 형제의 나라 대한민국의 지금 상황이 많이 어수선하다는 걸 감안해서 한마디 해주신다면?

네신: 음, 반세기 앞서 집필한 것이기는 하지만, 지금의 대한민국과 절묘하게 딱 떨어지는 《개가 남긴 한 마디》를 추천하는 게 좋겠군요. 경제 대통령 뽑는 선거부터 내 탓 네 탓하고 있는 지금 상황까지, 예민한 분들은 어쩌면 소름이 돋을지도 모르겠네요. 아, 오해는 사절합니다. 제게 신기가 있는 건 아닙니다. 터키나 한국이나 비극적으로 희극적인 정치 상황들이 닮아서 생긴 일이니까요. 〈까마귀가 된 파디샤〉,〈진짜 도둑과 녹슨 주석〉,〈당신을 선출한 죄〉,〈아주 무서운 농담〉,〈개가 남긴 한 마디〉, 〈내 잘못이 아니야〉, ……. 작품을 나열하자니 숨이 가쁜데요? (웃음) 녹색 성장이다 뭐다 국민들이 고민이 많겠어요. 아무쪼록 건투를 빕니다.

Q5, 당신은 《튤슈를 사랑한다는 것은》이라는 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책도, 아이들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한 동화도 냈습니다. 그렇지만 아지즈 네신의 중심은 뭐니 뭐니 해도 풍자라는 단어로 압축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에게 풍자는 어떤 의미를 가지나요? 아지즈 네신의 풍자관을 알고 싶습니다. 풍자가 가진 힘이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네신: 저의 풍자관은 아주 단순합니다. 풍자는 세상을 웃음거리가 되는 것으로부터 구제해주지요. 풍자는 냉소와 다릅니다. 《당나귀는 당나귀답게》에서 저는 이런 마음을 풀어놓았습니다. “요즘도 저편의 밝은 곳으로 가기 위해 쉼 없이 유리창에 부딪히며 애를 쓰는 파리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다 목숨을 잃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그런 것을 바보짓이라고 생각하며 어두운 곳에 죽치고 앉아 있는 파리들도 있을 것이다. 어떤 길을 택할 것인지는 파리들 자신이 알아서 할 일이다. 하지만 진실은 있다. 어둠 속에 죽치고 앉아 있는 파리의 기념비가 세워졌다는 얘기는 파리들의 역사 그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까.” 부조리한 상황에 분노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연대하고 실천하는 것, 주변을 껴안는 것, 그게 중요하지요.

아지즈 네신 AZIZ NESIN

본명은 메흐멧 누스렛(Mehmet Nusret). 1915년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태어났다. 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예술 아카데미에서 문학 공부를 했다. 졸업 후에는 직업 군인으로 근무했는데, 이때부터 '베디아 네신'이란 필명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44년 육군 중위로 퇴역한 뒤, 신문 기자를 거쳐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신문 기자 시절, '카라괴즈'등의 신문에 발표한 풍자 소설과 콩트가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는 시뿐만 아니라 소설, 희곡, 평론 등의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면서 백여 권이 넘는 작품 들을 남겼다.

그의 수많은 작품들은 영어, 독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를 비롯해서 34개국 언어로 번역되었고, 이탈리아, 러시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풍자 문학상을 휩쓸기도 하였다. 1972년에는 고아들에게 교육 기회를 마련해주기 위해 '네신 재단'을 설립했으며, 1995년 사망 후 유언에 따라 그의 작품에서 발생되는 모든 인세가 이 재단에 기부되고 있다. 국내에 소개된 작품으로는 「생사불명 야샤르」「제이넵의 비밀 편지」「당나귀는 당나귀답게」「튤슈를 사랑한다는 것은」「개가 남긴 한 마디」「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가 있다.


글. 푸른숲 문학교양팀 카스테라
청소년팀 고고싱

2009/03/19 15:30 2009/03/19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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