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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거짓말을 해봐 - 사랑 좀 해본 편집자의 기획 일지 #1 :: 2010/05/31 17:23
비겁의 연대기
1997년 5월 31일, 정확하게 13년 전 오늘이다. 나는 대학교 2학년이었고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는 그날 이제는 이름도 잊힌 한총련 출범식이 열릴 예정이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못 열릴 상황에 놓였다고 해야 맞다. 학교는 여남은 개의 출입구는 물론 ‘개구멍’까지 경찰들에 막혀 완전히 ‘밀봉’ 상태였다. 깔린 경찰만 2만이라고 했다. 학교 앞 지하철역은 물론 앞뒤 두 개 역까지 모조리 입구를 봉쇄당해 전국에서 올라온 대학생들은 우리 학교로 진입하지 못한 채 서울 시내 곳곳의 학교에 흩어져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학교 안에서도 전경들을 뚫어보겠다고 별별 일들을 다했으나 틈만 나면 지랄탄과 최루탄을 쏘아대는 바람에 몇몇 친구들은 피부가 짓무를 정도였다.
이렇게까지 말하고 보니 내가 무슨 영웅적인 전술로 이 밀봉을 뚫었다, 얘기해야 이야기가 술술 풀리겠으나 사실 나는 ‘그때 그곳’에 없었다. 5월 30일부터 6월 1일까지, 나는 학교에서 한 이십 분쯤 떨어진 자취방에 머물렀다. 여자 친구 자취방에서 2박 3일을 보낸 것이다. 몸이 워낙에 약하고 자주 아팠던 여자 친구는 마침 또 몸살이 찾아왔다. 남자 친구라고 하나 있는 것이 한 달에 술을 얼마나 먹나 시험해보겠다고 술을 마셔대며 연애에도 공부에도 무관심했으니, 몸살이 나도 진작 났을 일이다.
미안한 마음에 아침에 찾아가 밥 차려 먹이고 약 지어 먹이고 학교로 향할 예정이었다. 어쩌면 무슨 영화마냥 비장한 각오를 다지기 위해 마지막 인사라도 하고 떠나올 심산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이 아팠다.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는데 열이 심했다. 열이 좀 내려가는 걸 보고 가겠단 생각에 옆에 누웠다 잠이 들었는데 어느새 저녁. 5시 뉴스 등에도 출범식 관련 소식이 나왔다. 행사 전날이 되니 출입구를 확보하려는 학생들도 과격해지고, 전경들도 여느 때와 다르게 물러섬 없이 진압을 했다. 아, 이것은 ‘한양대 vs 성동서’의 지역구 싸움하고는 판이 달랐던 것이다. 솔직히 겁이 났다. 아무리 그 학교 재학생이라지만 이 격전장을 굳이 들어가겠다는 사람을 수상하게 보지 않는 경찰이 있다면 그것은 직무유기인 셈이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
여자 친구는 몸에서 열이 빠져나가는 대신 이성이 들어차기 시작했나 보다. 그 녀석이 나를 붙잡았다. 아니 그 녀석의 말을 핑계로 삼아 들어가기를 포기했다는 게 조금 더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저길 꼭 가야 돼?” 여기까지만 해도 괜찮았으나 다음 한마디, “나를 두고?” 바로 그 한마디에 발목이 잡힌 것이다.
그 녀석을 설득해야 했다. 전국에서 학생들이 기어이 올라와, 기어이 한군데 모여 집회를 하겠다는 게 일단 이해불가, 그런다고 세상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순진한 것, 그리고 그걸 꼭 왜 니가 해야 하는가……. 이런 유의 대화란 교회 다니는 친구에게 진화론을 설득해야 하는 끝이 보이지 않는 논쟁의 세계다.
대화가 밤을 새고 다음 날이 되었을 즈음엔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나를 가장 사랑한다는 사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하나에게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그것이 옳다고 믿으며 그리하여 그로써 세상을 조금이나마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으로 만들어보겠다는 신념을 설득하지 못하는데 저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저 아이 하나를 설득하지 못하면서 무슨 세상을 바꾼단 말인가. 그것은 학생회 활동이나 사회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정작 보수적인 부모님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숨기는 선배들의 모습을 보고 늘상 들었던 생각이기도 했다. 역시나 다만 겁이 났을 뿐. 모든 것은 핑계였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바꾸는 것도, 그런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것도, 그런 꿈을 꾸는 것도 좋은데 겁이 나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계삼의 말처럼 “변혁의 열망으로 치장했으나 다만 소박한 우정의 근거지를 위해” 그렇게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재미 없이 의미 없다
(자, 이제 기획 이야기로 돌아가 아전인수, 견강부회를 해야 할 시간이다.)
종종 사장님께서 외부 인사들을 만날 때 그런 말씀을 하신다. 신문을 읽다가, 지인을 만났다가 이런 거 만들어보면 어떨까 편집자들에게 자료를 주시곤 하는데 아이템 회의를 통과하기 참 어렵다고. (아…… 회사 생활은 어려운 것이다.) 나 역시 이러저러한 글을 보고, 사람을 만나고 이런 책을 해보고 싶습니다, 아이템 회의를 자주 하는 편이다. 승률이 낮은 편은 아니나 최근에 실패한 책이 하나 있다.
꿀벌에 대한 책이었다. 꿀벌의 생태와 경영의 팁을 연관 지어 설명하는 그런 책이다. 로버트 그린의 《전쟁의 기술》《권력의 법칙》이나 정진홍의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같은 책들을 보면 세상만사가 경영의 지혜로 포장된다. 만물은 경제경영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다. 그래서 생체모방도 하는 마당에 다른 생물들의 생존 전략을 경영전략 책으로 만들어보자, 이런 게 책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샘플 원서를 받아서 번역자에게 전달, 번역자에게 발췌번역을 받아서 기획안 작성, 그리고 아이템 회의. 이게 순서다. 그런데 번역자가 딴지를 건다. 한마디로 함량미달. 사실 이런 경우에 “아, 그렇군요” 하면서 쿨하게 킬하고 다른 책을 찾으면 될 일이다. 하지만 나는 내 방향이 맞다고 생각했다. 내용 자체보다 컨셉이 살아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막연한 믿음도 있었다. 세상이 마치 이런 책을 기다리고 있기라도 하는 양, 이 책을 만들지 않으면 무슨 큰일이라도 나는 양.
그런데 이게 샘플 번역을 받아서 기획안을 쓰다 보니 뭔가 꺼림칙했다. 한마디로 찔렸다. 자랑할 것이 많은데 하지 못하고 참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자랑할 게 없는 것을 부러 만들어내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내가 이 책을 돈 주고 사서 볼 것 같지 않은데 누구 보고 읽으라고 이런 책을 만들겠다는 것이냐, 이것이 기획안을 쓰면서 내내 머릿속에 들었던 생각이다. 그래도 바보 같이 ‘회의는 해보자, 다른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할지도 모른다’며 기획안을 만들어 회의를 소집했다. 다른 사람들은 바보 같지 않았다.
나는 최초의 독자이니
사실 내 마음에 드는 책은 기획안부터 잘 써진다. 내가 왜 이것을 하고 싶은지, 이 책(저자)은 어떤 강점이 있는지, 어떤 사람이 읽을지, 바로 그 독자에게 어떤 가치를 줄 수 있고 주고 싶은지, 어떤 책 옆에 놓고 판매할 수 있는지 일사천리로 기획안이 써지는 것이다(사실 그럴 때 기획안은 날림으로 써도 타율이 좋다). 이미 나는 그 책에 설득당했으니 뭐에 홀린 사람마냥 전도만 잘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꿀벌’ 같은 책은 기획안을 만드는 과정, 회의를 하는 과정 자체가 나를 설득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준비되지 않은 회의, 준비되지 않은 기획은 옆에서 봐도 티가 나는 일이니 상대방을 설득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정리한 원칙은 그래서 바로 이런 것이다. “나는 최초의 독자, 내가 재미없으면 남도 재미없다. 아니 최소한 재미있게 만들 수 없으면서 사서 읽어보라고 남에게 건넬 수 없다. 그런 책은 만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에게 재미있는 책을 만든다.” 그렇지 않은 책이라면 그것을 기쁘게 읽고 잘 만들 주인을 찾아가게 될 것이다. (물론 마음에 들지 않는 책, 편집자의 생각이 저자의 가치관과 접점을 찾을 수 없는 책도 기술적으로 잘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 편집자이기는 하다.)
그래서 트위터라는 것을 하면서 자기소개에 이런 말을 써놓고 트위터를 들어갈 때마다 그 글을 보면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려고 끼적대며 궁리를 할 때마다 새기곤 한다. “푸른숲에서 책을 만듭니다. 내가 궁금하고 내가 읽고 싶은 책만 만들고 싶은…….”
*후일담. 그해 초여름 과 선배 한 명은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당했다. 여전히 교문이 굳게 닫혀 있던 6월 초순 학내에 있던 시민을 학생들이 조사하는 과정에서 폭행사망 사건이 발생했다. 한마당이라 불리는 학교 깊숙한 곳까지 전경 버스가 들어와 현장 조사를 벌였다. 총학 간부 대여섯이 구속되었다.
나는 다음 해 과 학생회장이 되었다. 여자 친구는 있는 듯 없는 듯 잘 참아주더니 나의 임기가 끝난 다음 날, 조용히 나를 불러 헤어지자고 했다. 나는 그러마고 했다.





